학교에서 한 학기나 한 학년을 마칠 때 종(終)업식을 할 수 있다. 회사에서도 한 사업년도를 마치는 마지막 날에 종업식을 한다. 한 강의 과목을 마칠 때는 종강이다. 그런데 하나의 개별 단위가 아니라 정규 과정을 마칠 때는 졸업이라 한다. 영어로는 그레이드(grade)가 올라가는 ‘graduate‘다. 하지만 졸업이라는 낱말은 그래주에이트와 상반되는 뜻을 담고 있다. 졸업하면 올라가기보다 낮아지기에. 도대체 뭐가 어쨌길래?
마칠 종(終)은 단순히 끝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칠 졸(卒)은 그 뜻이 복잡미묘하다. 장기판에서 적과 가장 앞에서 직접 마주치고 있는 卒은 미약한 존재다. 크기부터 가장 작다. 후퇴도 못한다. 전진할 때는 한 칸만 나갈 수 있다. 행동 범위가 좁다. 손쉽게 잡혀 죽는다. 졸은 졸병이다. 비표준어인 쫄다는 쫄병처럼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를 뜻한다. 국물도 너무 끓이면 위축돼 쫄게 된다. 그런데 졸업식이라니? 대학교를 졸업했다면 4년의 정규과정을 당당히 마쳤는데 왜 쫄병 卒을 써서 졸업식이라 할까? 필자는 10+1=11의 공식으로 나름 해설한다. 그럴 듯한 일(一)설이 될 수 있는 이(異)설은 되겠다. 터무늬 없는 낭(浪)설이나 쓰잘데 없는 잡(雜)설은 아니길 바란다.
1 2 3 4 5 6 7 8 9 10은 한국말로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중국말로는 이 얼 싼 쓰 우 류 치 파 쥬 싀. 일본말로는 이찌 니 산 시 고 로꾸 시찌 하찌 규 쥬. 같은 한자권 문화이기에 발음이 비슷하다. 그런데 우리 고유의 발음은 다르다. 하나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책에 따르면 이 16개 글자들은 천부경(天符經) 진본으로 나중에 숫자로 쓰이게 되었단다. 최치원의 81자 ‘천부경’은 16자 천부경을 예찬한 시란다. 뭔가 끌리며 왠지 와닿는다. 필자는 이 칼럼의 149번째 글에서 16글자 천부경의 뜻을 간략하게 전달한 바 있다. 마지막 글자인 열은 단지 10(Ten, 十)이 아니다. 문을 열어(開) 열다(open)는 뜻이다. 이제 한 쌍의 남녀가 부부가 되어 애도 낳고 가족을 이루었으니 문 열어 다른 가족들과 어울려 살라는 뜻이다. 밝은 심성을 지닌 우리 밝달, 즉 배달(倍達) 민족은 모두 함께 널리 이롭게 사는 홍익(弘益) 인간들이었다.
그렇게 자기만의 울타리를 열고 나가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내 울타리 안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였지만 문 열고 밖으로 나가면 나는 가장 낮은 지위에 선다. 한마디로 졸의 위치가 되는 것이다. 가령 대학교 4학년은 가장 높은 지위지만 졸업하면 사회 초년생이 된다. 취업하면 신입사원이다. 처음 일(1)의 단계인 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종업식이 아니라 졸업식이라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인생의 마디마디마다 졸업을 한다. 내 안의 문을 열(10)고 나아가 처음(1) 단계인 졸(11)이 된다. 졸이 가진 처음의 자세와 심정을 유지하는 게 잘 사는 길이다. 11인 졸의 초심(初心)을 잃지 말며 살아야 길하다.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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