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할 성(皿-7)덕 덕(彳-12)지극할 지(至-0)착할 선(口-9)
군주가 아니라도 누구나 바라는 일은 살아서는 칭송을 받고 죽어서는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리라. 그리되려면 '盛德至善(성덕지선)' 즉 대단한 덕을 갖추어 지극한 선을 이루어야 한다. 대단한 덕은 자신의 내면에 갖춘 힘이고, 지극한 선은 그 힘을 발휘하여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과정과 결과다. 그저 덕만 갖추어서는 아무도 칭송하지 않고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 덕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고, 베풀어서 그들을 좋게 해주어야 한다. 그게 지극한 선이다.
덕이 있음에도 그 덕을 쓰지 않는다면, 그 덕은 무용지물이다. 아무 데도 쓰이지 않는 덕은 한낱 허울이고 겉치레일 뿐이다. 그런 허울이나 겉치레는 남은커녕 자신에게도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사실 누구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는 덕은 덕이 아니다. 그런 덕은 착실하게 배우고 익혀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저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저 홀로 생각만 거듭해서 얻은 관념적인 덕에 지나지 않으며, 僞善(위선)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학문을 한다면서 그런 수준에서 그치는 이들이 숱하게 많다.
대단한 덕과 지극한 선은 안과 밖의 관계에 있다. 덕은 내면에 쌓은 것이고, 선은 밖으로 베푼 것이다. 배움과 스스로 닦음이 덕을 쌓는 과정이다. 배우면 갈무리해야 하는데, 갈무리는 암송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야만 제대로 된다. 머리가 아닌 몸에 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몸에 갈무리하는 일이 곧 닦음이다.
닦는 일에서 반드시 지니게 되는 마음이 두려운 듯 삼가는 마음이다. 사람들을 대하거나 일을 할 때면 비로소 닦은 것이 드러나므로 자칫 모자라고 서툰데도 나선 것이 아닐까 두려워서 삼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머뭇거리며 사람들을 꺼리고 일을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는 닦은 덕을 쓸 수도 없을 뿐더러 무엇이 얼마나 미흡한지 알 길도 없어서 더 나아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두렵더라도 실행하면서 배우는 마음이 곧 삼가는 마음이다.
스스로 두려워하며 삼가면서 한결같이 배우고 닦으면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이 위엄이다. 위엄은 권위와 다르다. 권위는 높은 지위나 명성 따위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위세다. 반면에 위엄은 그 사람의 '안'에 갈무리되어 있는 덕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세다. 권위는 갖기 쉬우나 쉽게 사그라질 수 있고, 위엄은 드러내기 어려우나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런 위엄이라야 참으로 환하게 느껴져서 사람들이 기꺼이 따르거나 가까이한다. 그리고 그가 떠나면 그를 그리워한다. 맹자가 말한 天爵(천작) 곧 하늘이 준 벼슬이 위엄이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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