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147> 失節事極大

bindol 2021. 6. 4. 06:00

잃을 실(大-2)절개 절(竹-9)일 사(-7)용마루 극(木-9)클 대(大-0)

 

어느 때부터인가 예의는 사람과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을 옭죄고 삶을 억누르는 틀로써 구실하게 되었다. 예의란 삶을 위해, 사람을 길러주기 위해 고안된 것임을 잊거나 간과한 것이다. 아무리 예의가 사회의 질서 유지와 국가의 존속을 위해 중요한 것이라 해도 먼저 사람이 살아야 함에도 도리어 윤리와 도덕이라는 관념을 예의에 덧씌우면서 유교는 왜곡되어 왔다.

송대의 성리학자인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은 "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아사사극소, 실절사극대) 곧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지극히 큰일이다"라고 말했다. 얼핏 그럴 듯해 보이지만, 가만히 새겨보면 참으로 폭력적이다. 그런데 이 말을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신주 모시듯이 했다. 그런데 패거리를 지어 끊임없이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백성을 궁핍과 질병 속으로 내동댕이친 이들이 누구였던가? 남한산성의 치욕을 초래한 이들이 누구였으며, 조선의 멸망을 부채질한 이들은 또 누구였던가?

대체 절개는 누구를 위한 절개이며, 진정 누구를 위한 절개여야 하는가? 군주든 관리든 그들의 절개는 바로 백성들을 살리고 지키는 데서 오롯해진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데도 잘 먹이거나 잘 입히지 않고서 절개를 운운하는 것은 지식과 권력을 독점한 자들의 간교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과 삶을 제쳐두고서 절개나 도덕을 운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의 없는 짓이고 위선이다.

순자가 말했듯이 예의는 삶을 길러주는 것이어야 한다. "송사를 없도록 할 것이다"라고 한 공자의 말에도 이런 뜻이 담겨 있다. 백성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도록 해준다면, 어찌 송사가 일어나겠는가? 설령 송사가 일어나더라도 예의로써 잡도리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을 길러주지 못한다면, 예의는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삶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장치로 이용될 것이니, 그렇다면 법령이나 형벌보다 나을 게 뭐 있겠는가?

예의는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타율적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 지키게 하려면 그럴 마음이 일어나도록 먼저 해주어야 한다. 삶의 물질적 조건을 먼저 갖추어주는 일이 예치에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기' '貨殖列傳(화식열전)'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곳간이 가득 차야 예의와 절개를 알고,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고 했다. 예의는 재물이 있는 데서 생겨나고, 재물이 없는 데서 사라진다. 그래서 군자가 부유해지면 덕을 즐겨 실천하고, 소인이 부유해지면 제 힘에 맞게 일한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