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242> 斜封官

bindol 2021. 6. 6. 05:08

비스듬할 사(斗-7)봉할 봉(寸-6)벼슬 관(宀-5)

 

당나라 中宗(중종, 705∼710 재위) 때 ‘斜封官(사봉관)’이라 불리는 관직이 있었다.

중종은 高宗(고종, 649∼683 재위) 李治(이치)의 아들로, 두 번 제위에 올랐다. 684년에 고종을 이어 제위에 올랐으나, 3개월 만에 武則天(무측천)에 의해 폐위되어 한낱 廬陵王(여릉왕)이 되었다. 그 뒤 704년에 재상 張柬之(장간지) 등이 변란을 일으켜 무측천을 퇴위시키고 여릉왕을 다시 복위시켰다.

오랜 유폐 생활 속에서 온갖 치욕과 고초를 겪다가 다시 제위에 오른 중종은 새로 기강을 정립하고 통치에 힘쓰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옷과 편안한 자리에 만족하며 權柄(권병)을 황후 韋氏(위씨)에게 맡겨버렸다. 이에 위후는 딸들인 安樂公主(안락공주)와 長寧公主(장녕공주), 여동생 郕國夫人(성국부인), 上官婕妤(상관첩여), 尙宮柴氏(상궁시씨), 무녀인 第五英兒(제오영아) 등 몇몇 여인들과 권세를 쥐고 궁중의 일을 맘대로 처리했다. 특히 이들은 賣官賣職(매관매직)을 일삼았는데, 도살꾼이나 술 파는 자, 못된 짓을 하는 자 누구라도 돈 30만 전을 바치면 황제의 칙령을 써 주어 관직을 제수받게 해주었다.

이때 봉투를 비스듬히 붙여서는 인사를 담당하는 吏部(이부)를 거치지도 않고 곧바로 中書省(중서성)으로 넘겼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얻은 관직을 ‘사봉관’이라 불렀다.

관직과 작위를 돈을 받고 마구 내주었으니, 기강이 무너지고 공무가 어지러워질 것은 뻔했다. 상관첩여 등은 모두 궁궐 밖에 거대한 저택을 가지고 있으면서 궁중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는데,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조정의 관리들도 모두 그들의 문하에서 나왔으며, 서로 뇌물을 주고받으며 이끌어주고 밀어주었다. 이렇게 부패가 극에 달했는데도 중종은 나 몰라라 하고 손을 놓고 있었다.

710년, 위후가 음란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위후는 추궁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딸 장락공주와 함께 중종을 독살하고, 아들 重茂(중무)를 세워 자신이 정권을 독단했다. 그러나 얼마 뒤, 나중에 玄宗(현종)이 되는 李隆基(이융기)가 정변을 일으켜 위후를 죽이고 그 일당을 제거했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