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할 호(女-3)남 인(人-0)의 지(丿-3)바 소(戶-4)싫어할 오(心-8)
목공은 기산 아래 촌사람들이 말을 잡아먹은 것을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술까지 내렸으니, 참으로 백성을 아낄 줄 아는 어진 군주였다. 어진 군주였으므로 晉(진)나라에 기근이 들어 혜공이 식량을 요청하자, 혜공이 자신에게 여덟 개 성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긴 것은 제쳐두고 식량을 보내주었던 것이다. 반면에 혜공은 목공과 전혀 다른 마음을 지닌 인물임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그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은혜를 입은 나라에서 기근이 든 틈을 노려 군대를 일으켰다. 이야말로 “好人之所惡, 惡人之所好”(호인지소오, 오인지소호) 곧 “남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이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는 짓을 했으니, 전쟁에서 적군에게 사로잡히는 재앙을 당한 것도 마땅하다. 목공도 사람이었던지라 혜공을 포로로 잡아 돌아와서는 전국에 포고를 내렸다.
“모두들 목욕재계하라. 내가 혜공을 제물로 삼아 상제께 제사를 올릴 것이다.”
주 왕실의 천자가 그 소식을 듣고는 “晉(진)나라 군주는 나와 같은 성씨오!”라며 용서를 청했다. 또 목공의 부인은 혜공의 누이였으므로 상복을 입고 맨발로 달려와서는 “소첩이 평소 피붙이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군주로 하여금 이런 치욕스런 명령을 내리게 했습니다!”라고 사죄했다. 이에 목공은 처음의 생각을 접고 혜공을 귀빈으로 대접한 뒤에 귀국하게 해주었다. 이로써 목공이 그 명망을 천하에 떨쳤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선대 군주들이 중원의 제후국들로부터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꼈던 것처럼 목공 또한 그러했다. 목공이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널리 구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것은 동방으로 진출하여 소외감과 박탈감을 떨쳐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열등감과 욕심이 있었던 목공이었으므로 鄭(정)나라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 군대를 일으켰다가 쓰디쓴 패배를 경험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기’ <秦本紀(진본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목공 32년(기원전 528년)에 정나라 사람이 진나라에 정나라를 팔아넘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성문을 맡은 사람이니, 정나라를 습격할 수 있습니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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