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플 애(口-6)제후 공(八-2)성 강(女-6)씨 씨(氏-0)
통치나 정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군주와 신하들, 군주와 백성, 신하들과 백성 세 가지 관계가 존재한다. 어떤 관계든지 어느 한쪽이 일방적 우위를 차지할 때는 조화롭지 못하며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관계란 본래 쌍방향적이지,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주고받는 관계로 보더라도,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지도 않는다. 주고받는 것이 다를지언정.
앞서 哀公(애공)이 유약에게 재정 문제로 방안을 물었을 때, 애공은 오로지 군림하는 통치자로서 자신의 입장만 염두에 두었다. 백성의 입장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애공이 ‘슬픈 제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권력이 계손씨·숙손씨·맹손씨 등 대부 집안의 손에 들어간 지 오래여서 명령이 거기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임에도 그 문제의 원인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또 그럴 의지도 없었음이 분명하다. 애공을 비롯한 노나라의 역대 군주들은 민심을 얻는 일보다 자리보전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이미 민심을 잃었는데, 백성으로부터 더 세금을 거두어서 군주의 財用(재용)을 넉넉히 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애공이 군주로서 결격인 이유는 통치와 정치의 기본 원리를 전혀 알지 못한 데에 있다. 그리고 대부 집안인 계손씨가 민심을 등에 업고 정치를 잘 해나간다고 하더라도 군주가 군주로서 권위를 잃고 통치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나라는 부강해지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늘 이웃 제나라의 위세에 눌려 있었던 것이다.
姜氏(강씨)가 군주로 있던 제나라가 춘추시대에 쇠퇴의 길을 걸었던 것은 대부 집안인 田氏(전씨)가 전횡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전국시대에 들어서 전씨가 강씨를 내몰고 군주의 자리를 빼앗았다. 그 뒤로 제나라는 다시 부강해졌는데, 모든 명령이 군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제나라의 권력을 계속해서 전씨가 쥐고 있기는 했으나, 그 전씨가 군주의 집안인 公室(공실)이 되면서 사뭇 달라졌던 것이다. 군주가 중심을 잡고 민심을 얻어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해진다는 말이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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