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涯知己·천애지기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지원(1737~1805)은
혼천의·자명종을 완성해 사설 천문대를 세웠던 실학자 홍대용(1731년~1783)의 묘지명
‘洪德保墓誌銘(홍덕보묘지명)’을 썼다.
다음은 그중 마지막 대목이다. 덕보(德保)는 홍대용의 자(字)다.
“噫!(희) 其在世時(기재세시)
已落落如往古奇蹟(이락락여왕고기적)
有友朋至性者(유우붕지성자)
必將廣其傳(필장광기전)
非獨名遍江南(비독명편강남)
則不待誌其墓(칙불대지기묘)
以不朽德保也(이불후덕보야).
”(아아! 그는 살아 있을 때 이미 우뚝하여 옛사람들의 기이한 자취와도 같았기에,
지성(至性)의 벗이 있어 필시 그의 사적을 널리 전할 것이므로,
비단 이름이 양자강 이남에만 두루 퍼지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묘에 묘지를 묻을 것도 없이 덕보의 명성은 불후하게 되리라.)
홍대용은 1742년 열두 살 때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있던 석실서원으로 김원행을 찾아가 수학했다. 석실서원은 노론 기호학파의 산실로, 같은 석실 출신의 홍대용과 박지원은 깊이 교유했다.
박지원은 이 묘지명 앞부분에서 홍대용의 행적을 순차로 기술하고 평하는 격식을 벗어나, 홍대용과 중국 항주 학자들과의 교유에 초점을 맞춰 그 자초지종을 적었다.
홍대용은 35세 때인 1765년(영조 41년) 서장관인 작은아버지 홍억을 따라 북경을 방문해 중국 학자들 및 독일계 선교사들을 만나 서양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이때 북경의 유리창(琉璃廠)에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사귀었는데, 이 세 선비와의 교유는 오래 지속됐다. 이들의 사귐은 홍대용의 손자 대까지 이어졌다. 박지원은 홍대용의 이런 교유에 부러움을 느껴 자신도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이나 만주인·몽고인을 막론하고, 숙소를 몰래 빠져나가 밤새 필담을 나눴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홍대용과 박지원의 시선은 이미 중국을 넘어섰으며, 이후 미몽 속에 헤매는 조선 지식인들을 계도하고자 하였다. 홍대용과 엄성 등의 이러한 교유를 천애지기(天涯知己·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알아주는 각별한 벗)라 하는데, 요즘 세상 어떠한지 생각해보게 된다.
시인·고전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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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涯는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비유하는 말이며,
천애지기란 만 리나 떨어져 있어도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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