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92] 일본 패망 재촉한 ‘임팔 작전’
2차 대전 당시 인도 북동부 마니푸르주 임팔 일대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해 탱크와 함께 진격하는 구르카 용병 군대. 1944년 3월 8일~ 7월 3일 사이 영국 정보 당국 촬영. /미 의회도서관
1944년 3월 버마를 점령 중이던 일본군은 인도 북부에서 치고 들어오는 영국군을 상대로 ‘임팔 작전’에 돌입한다. 적의 거점인 임팔, 코히마를 기습 공격해 인도·버마 전선에서 주도권을 회복하고 연합국의 중국행 보급로를 차단한다는 계획이었다. 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가 보급 사정을 등한시한 채 주도한 이 작전은 몇 달 만에 8만 여 병력을 희생시키며 일본 패망을 재촉한 ‘광기(狂氣)의 작전’으로 알려져 있다.
보급 단절로 일선에서 막대한 희생이 속출하자 작전을 수행 중이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가 사령부 지시를 무시하고 독단으로 철군 명령을 내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단장급 고위 지휘관으로서는 초유의 항명 사건이었다. 처형을 각오한 사토는 작전의 무모함을 철저히 따질 작정이었으나, 군 수뇌부는 사토를 보직 해임에 처하고는 서둘러 사건을 봉합하고자 했다. 사토는 정신병자로 몰리며 한동안 작전 실패의 원흉이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작전 취소를 건의한 다른 두 사단장도 중도에 경질되었지만, 정작 온갖 반대에도 작전을 강행한 무타구치는 본국 소환 후 예편 조치에 그쳤다. 파벌로 찢긴 채 자기편 챙기기가 횡행하고 전황 악화 책임 전가에 급급한 당시 군부의 체질로는 이미 정상적인 전쟁 수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전후(戰後) 작전의 실상이 밝혀지면서 어떠한 난관도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며 작전을 밀어붙인 무타구치는 ‘3대 오물(汚物)’이라는 오명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 자신은 ‘작전 실패는 부하들 탓’이라는 추한 변명을 말년까지 늘어놓아 세간의 비웃음을 더했다.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전체의 이익을 해하는 자가 누구인지, 책임을 물어야 할 자가 누구인지, 무엇이 명예인지, 누구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혼란스러운 국가가 공동체로서의 응집력을 발휘하며 단합하는 것은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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