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전인수 정치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한국인들이 흔히 쓰는 ‘아전인수(我田引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사자성어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 ‘흥청망청’(興淸亡淸) 등이 조선제(製) 사자성어이듯이 일본에도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사자성어가 있다. 이를 ‘화제숙어’(和製熟語)라고 부르기도 한다. 침소봉대, 시행착오, 유유자적, 일석이조 등은 한국인의 언어 습관에 밀착된 대표적인 화제숙어다.
에도 중기 이후 일본 농촌은 보와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용 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관개농업이 보편화되었다. 일본에서는 전(田)을 논의 의미로 쓰고 밭은 하타케[畑]라고 한다. 물이 풍족하면 문제가 없지만, 부족할 때에는 남보다 먼저 자기 논[我田]에 물을 끌어다[引水] 쓰려는 사람들로 인해 분쟁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전인수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한 말이다. 인터넷 어휘 사전 ‘윅셔너리’ 일본어판은 아전인수를 ‘물 분배를 위임받은 공동체 대표가 자기 논에 물을 먼저 대는 이기적 행동을 비난하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라고 설명한다. 요즘 말로 하면 ‘대리인 딜레마’다. 권한을 위임받은 자가 정보의 비대칭성, 감시의 불완전성 등으로 인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우고 위임자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할 가능성을 말한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아전인수가 공공의 이익보다 사사로움을 앞세우는 행위라는 뉘앙스가 강하다. 반면 한국에서는 어떠한 발언,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한 식으로 갖다 붙인다는 ‘견강부회’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같은 말이지만 그 뜻은 한일 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적인 의미이건 일본적인 의미이건 아전인수는 정치판의 생리이다. 세를 모으고 선거를 치러야 하는 현대 정치인에게 아전인수는 생존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유력 정치인들이 대권 출사표를 던지는 대선 시즌을 맞아 더욱 달콤해지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 숨어 있는 아전인수를 경계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 의식의 표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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