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영도하는 당의 군대, 문화혁명의 주도권을 잡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중국 인민해방군은 마오주석께서 친히 창건하시고, 영도하시고, 지휘하시는 인민의 군대다!”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30회>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국가는 배타적 영토 내에서 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모든 구성원에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조직이다. 공권력의 합법적 행사가 국가의 근본 책무이며, 존립이유다. 공권력의 양대(兩大) 축은 군대와 경찰이다. 군대의 명령계통이 무너지고 경찰의 지휘체계가 흔들릴 때, 정부는 사실상 작동을 멈춘다. 국가의 기초가 이미 허물어진 상태다.
그러한 극한의 상황이 닥치면, 개개인은 자위(自衛)의 무장을 한다. 사회 전역에선 독버섯처럼 무장집단들이 돋아난다. 역사에서 종종 보는 “군웅할거”의 대혼란은 중앙정부의 체계적 붕괴에 따른 지방 세력의 군사화를 이른다. 지난 20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증명하듯, 지방의 군사화는 내전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1978년 12월 13일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폭로된 자료에 따르면, 문혁 10년 간 무려 4300여 건의 대규모 “무장투쟁”이 발생해서 12만3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공산당의 전일적인 일당독재 하에서 과연 어떻게 그토록 참혹한 무정부의 대혼란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중국 인민해방군은 마오쩌둥 사상의 대학교,” 문혁 당시 군대의 주도권을 보여주는 포스터/ 공공부문>
“인민해방군, 혁명간부, 혁명군중의 三結合”
1966년 12월 말 중앙문혁소조 장춘차오는 상하이 공총사의 영수 왕홍원(王洪文, 1935-1992)에 본격적인 탈권의 투쟁을 개시하라 지시했다. 상하이에서 탈권의 투쟁이 전개되자 즉시 상하이의 지역 군대가 공총사를 엄호했다. 상하이 1월 폭풍은 군·당·민의 합작품이었다. 그 결과로 등장한 혁명위원회는 인민해방군, 혁명간부 및 혁명군중의 삼결합(三結合)을 표방했다. 군대가 혁명군중의 투쟁에 개입해서 문혁의 주체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1967년 1월 상하이의 “탈권”을 지켜보던 전국 각지의 노동자·농민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조반(造反) 투쟁에 나섰다. 1967년 1월 31일 헤이룽장(黑龍江)성에 첫 번 째 “혁명위원회”가 들어섰다. 인민일보는 사설에서 “동북지역의 새로운 새벽이 밝았다”고 격찬했다. 곧이어 전국 각지에서 성(省) 정부의 권력을 허무는 권력 탈취의 투쟁이 벌어졌는데·······. 1967년 상반기까지 탈권에 성공한 지역은 고작 헤이룽장, 산둥, 괴이저우, 산시(山西), 베이징 정도에 그쳤다. 1월 18일 베이징에선 세 개의 상이한 조반파 집단들이 경쟁적으로 탈권(奪權)을 시도했지만, 정부의 승인은 석 달 후(4월 20일)에야 떨어졌다. 1968년 말엽에야 전국에 혁명위원회가 들어설 수 있었다.
<“베이징 혁명위원회 탄생 열렬히 환영!” / 공공부문>
군대 내 하극상 조짐...무력 진압
당시 마오쩌둥과 중공중앙은 군중조직에 세운 혁명정부를 가볍게 승인할 수 없었다. 첫째, 군중조직의 정체성이 문제가 됐다.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는 군중조직들은 서로 극심한 이념대립과 노선차이를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특정 조직 하나만을 선택해 탈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기란 쉽지 않았다.
둘째, 인민해방군 고위급 장성들은 반발이 격심했다. 혁명군중은 중공중앙의 류샤오치, 덩샤오핑에서 말단 지방정부의 관료집단 모두를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수정주의 반혁명세력이라 규탄한 상황이었다. 군부의 장성들 역시 고위 관료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도 불시에 조반파의 탈권 투쟁이 닥칠 수 있었다. 이미 군대 내부로 번져 군부 지휘체계에서 하극상의 조짐이 가사화된 상태였다. 규율과 질서를 생명으로 삼는 군대의 입장에선 방치할 수 없는 혼란이었다.
1967년 2월 11-16일 엿새 동안 인민해방군의 최고위 원수들은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중앙문혁소조를 비판한다. 아울러 치안과 질서를 파괴하는 조반파를 군이 나서서 강력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발언을 쏟아낸다. “2월 역류(逆流)”라 불리는 원수들의 반항이었다. 곧 이어 군에 의한 조반파에 대한 무력 진압(“2월 진반”)이 시작되어 그해 여름까지 지속됐다. 군이 문혁의 제1 주체가 되면서 발생한 필연적인 사태였다.
<“공업에선 다칭 유전(油田)을 배우고, 농업에선 다자이 마을을 배우고, 전국은 인민해방군을 배운다!” 군대가 문혁의 지도부로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포스터/ 공공부문>
혁명위원회 80% 이상 군인이 맡아
1967년 2월에서 1969년 말까지 전국의 각 지역에 280만의 군대 병력이 파견돼서 이른바 “삼지양군(三支兩軍)”의 임무를 수행했다. 여기서 삼지란 군대가 좌파군중, 노동자, 농민의 세 집단을 지원(支援)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양군이란 군관(軍管, 군사적 관제) 및 군훈(軍訓, 군대식 훈련)을 의미한다.
전국의 9개 성, 25개 대도시, 수십 개의 전구(專區), 수백 개의 현(縣)에서 전면적인 군대의 관제가 실행됐다. 현급 이상 혁명위원회의 80% 이상의 주임직을 군인들이 맡았다. 윈난성과 후베이성의 경우 그 비율이 97%에 달했다. 철도부, 교통부, 우편·전신부, 주요 신문·방송 등의 분야에서도 군정체제가 실시됐다. 문화혁명에 군대가 개입하면서 중국의 전 지역엔 혁명기 비상체제의 군부독재가 확립된 셈이었다.
대규모의 병력이 지방에 투입돼서 군이 직접 문혁을 이끌게 된 후, 1967년 여름 중국 곳곳에선 대규모의 무장투쟁이 발생했다. 군중집단, 지방정부, 군부대가 복잡하게 뒤엉키며 맞부딪힌 결과였다. 그 중 대표적 세 사건을 잠시 들춰 보면·······.
후난성 다오현(道縣)에선 1967년 8월 13일에서 10월 17일까지 66일 간 4193명이 도살당하고 326명이 자살했다. 인근 지역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는 9000명을 초과했다. 1967년 여름 후베이성 우한에선 좌·우 두 패로 나뉜 대규모의 무장조직이 내전에 돌입하여 무려 18만4000명의 사상자를 낳은 우한사건(7·20 사건)이 발생한다. 1968년 7월부터 8월까지 1개월 간 광시성에선 무려 8만4000여명의 "계급적인(階級敵人)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한다. 이 사건들에 대해선 앞으로 차차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중국공산당의 군사적 기원을 돌아보자.
<1968년 2월 5일 후베이성 혁명위원회 성립/ 공공부문>
인민해방군, 중국공산당이 창건한 당의 군대
다당제의 민주국가에서 군대는 정치적 중립을 생명으로 하는 국방군이다. 반면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중국공산당이 “창건하고, 영도하고, 지휘하는” 당군(黨軍)이다. 그 역사를 추적해 보면, 20세기 초반 군벌시대(1916-1928년)까지 소급된다. 군벌시기 12년 간 중국 전역에선 무려 1300여 명의 군벌들이 140번 이상의 대규모 성급(省級) 전쟁을 벌였다. 1921년 창당된 중국공산당 역시 자체 무장을 통한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출발했다.
이후 중일전쟁(1937-1945)과 국공내전(1946-1949)을 거치면서 중국공산당은 군사적 점령을 통해 “인민공화국”을 건설했다. 장기간 전쟁의 참화 속에 있었던 중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딱히 공산당의 이념에 동조했기보단, 모두가 중공정부의 군사력 앞에 항복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공포를 피해 ‘리바이어던’의 지배 속에 들어간 원초적 사회계약이었다고 할까.
<1949년 5월 27일 상하이에서 인민해방군을 환영하는 인파/ 공공부문>
이후 문혁 발발 직전까지 17년의 세월 동안, 중국에서 단 한 번의 대규모 무장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최대 4500만이 아사하는 대기근(1958-1961) 시기에도 중공정부의 전일적 지배구조는 흔들림 없이 유지됐다. 마침내 1964년 핵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중공정부는 다시금 정권의 정통성을 입증했다. 가장 강한 조직이 통치의 정당성을 갖는 “군사독재”의 적나라한 면모다.
요컨대 중국공산당은 막강한 군사력을 지렛대 삼아 정치권력을 독점한 철저한 관·군 합일의 조직이다. 1967년 “상하이 1월 폭풍” 직후, 마오쩌둥이 부리나케 혁명위원회를 설립해 인민해방군에 문화혁명의 주도권을 쥐게 한 소이가 거기에 있다. 1938년 11월 6일, 마오쩌둥은 말한 바 있다.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건 우리의 원칙이다. 총이 당을 지휘하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이후 당의 대표로서 총을 지휘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1971년 9월 13일 린뱌오를 숙청해야만 했다.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29회>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조직’에서 나온다...혁명을 빼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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