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대치 위해 천하대란 필요”...마오, 좌파 무장을 주문하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문혁 시기 군중조직의 무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진. 1967년 8월 충칭 추측/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35회>
1966년 12월 말 마오쩌둥은 전 중국에 곧 전개될 광란의 일대혼란을 예감하고 있었다. 게릴라 전사 마오쩌둥은 투쟁 없인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주자파 수정주의 반혁명세력이 창궐하는 당시의 중국에선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위한 천하대란”이 필요했다.
천하대란은 기존 정부 조직을 뒤흔들고 무너뜨리는 전면적 권력해체의 과정이었다. 천하대치란 표면상 군중조직, 혁명적 간부, 인민해방군의 삼결합(三結合)에 기초한 신생 혁명정권의 창출을 의미했는데, 마오의 의도와는 달리 전국 각지에선 “포탄이 터지고 화염이 치솟는 “포굉화소(炮轟火燒)”의 급변상황이 전개됐다. 결국 1968-69년 지역사회에선 행정, 사법 등 정부의 전권을 군대가 장악하는 군부독재가 펼쳐졌다.
<문화혁명 시기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선전 포스터/ 공공부문>
마오쩌둥 “노동자와 학생을 무장시켜라”
과연 마오쩌둥이 그 상황을 미리 내다봤을까? 관변 이데올로그들은 무장투쟁의 모든 책임을 사인방(四人幇)에 들씌우곤 한다. 예컨대 무장투쟁은 1967년 7월 21일 장칭(江靑, 1914-1991)이 직접 좌파군중을 향해 던진 “문공무위(文攻武衛),” 곧 “말과 글로 공격하되 무력으로 방어하라!”는 발언이 결정적 계기였다는 정도의 주장인데, 설득력이 없다.
중공중앙의 회의록을 보면, 이미 7월 18일 마오쩌둥이 우한군구의 사령관들을 불러 대담하는 자리에서 “노동자와 학생들이 무장을 하면 왜 안 되지? 내가 보기엔 그들을 무장시켜야만 한다!”고 발언했다. 최고영도자가 군중집단의 군사무장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명령했음을 보여준다.
“반혁명 우파 척결” 대규모 군사작전
또한 1967년 8월 4일 장칭에게 직접 보낸 서한에서 마오는 이미 무장한 좌파집단도 더 본격적인 제2의 무장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서 “75%의 군대 간부들이 우파조직을 지원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당면한 문혁의 주요문제는 바로 좌파의 무장”이라고 적었다. 물론 장칭은 마오쩌둥의 서신을 중공중앙에 전달했다.
요컨대 좌파군중의 군사적 무장은 마오쩌둥의 뜻에 따라 1967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무장한 좌파군중은 반혁명세력과 “우파” 조직을 색출해 척결하는 대규모 군사작전에 동원됐다고도 볼 수 있다.
1967년 5-6월 후베이성 우한에서 발생한 무장투쟁을 시작으로 8월 상순부터 장쑤성의 난징, 지린성의 창춘, 랴오닝성의 선양(瀋陽), 쓰촨성의 충칭(重慶), 후난성의 창사(長沙)에서 비슷한 시기 대규모의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이미 앞서 두 차례 다뤘던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17일까지 9000여 명을 몰살한 후난성 다오현(道縣)과 그 주변의 대규모 집단학살극 역시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일어났다.
<문혁 시기 무장투쟁 희생자들, 담장에는 “피로 피를 돌려주고, 목숨 바쳐 목숨을 되갚고!”란 구호가 보인다. 사진/ www.picturechina.com.cn>
무장투쟁 사상자 726만7000여명
군대와 경찰이 법과 질서를 유지해 장시간 평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로선 1967년 문혁 당시의 “무장투쟁”이 대체 어떤 상황인지 감조차 잡기 힘들다. 일단 피해자 규모를 짚어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문혁 시절 무장투쟁의 피해자에서 대해선 세 가지의 “불완전한 정부 통계”가 있다. 1) 1978년 12월 13일 중공중앙 공작회의 폐막식에서 최고위 장성 출신 “국가원수” 예졘잉(葉劍英, 1897-1986)은 문화혁명 시기 무장투쟁 사망자를 23만7000명이라 폭로했다. 2) 1982년 12차 전회 1차 대회에서 예졘잉은 다시 4300건의 대규모 무장투쟁이 발생했으며, 사망자의 수는 12만3700명이었다고 발표했다. 사망자 수가 처음 폭로 때의 52.2%로 축소됐는데, 3) 1984년 5월 중공중앙은 2년 7개월에 걸친 전면적 조사 결과 무장투쟁의 사망자는 23만7000명 (“비정상” 사망자 172만 명의 13.7%), 불구가 된 피해자가 703만 여명이라 발표했다. 요컨대 중공정부 공식 통계 상, 문혁 시기 무장투쟁의 사상자(死傷者)는 726만7000여 명에 달한다.
화포, 총기, 수류탄...대규모 내전
무장투쟁에서 사상자가 무려 700만이 넘었다면, 그 자체로 문화혁명은 대규모 내전이었다. 당시 사용된 무기를 보면, 내전의 실상을 더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중공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1969년 9월까지 군중집단에 “탈취된” 각종 총기는 187만 7216 자루, 각종 화포 1만 266점, 실탄 4억 4271만 개, 각종 포판 39만 642개, 수류탄 271만 9545개 등이다. 당시 공영매체는 무기가 “탈취됐다”고 보도했지만, 과연 “적수공권(赤手空拳)의 평범한 백성들이 군부대의 무기를 탈취할 수 있겠는가?”(중국의 비판 지식인 양지성[楊繼繩]의 질문) 실제로는 마오쩌둥의 “좌파 지원” 명령에 따라 군대가 직접 군중집단에 무기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마오쩌둥이 예감했던 “천하대란”이 사상자 700만을 낳은 거대한 규모의 내전이었을까? 그가 처음부터 내전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군중조직이 분열돼 내전을 벌이는 상황이 전개되자 허둥지둥 군대를 투입해 상황을 수습하려 했던 혐의가 짙다.
<문혁 시기 무장투쟁의 한 장면/ 공공부문>
마오 “인민해방군은 좌파 군중을 지원하라”
1967년 봄부터 후베이성 우한에서 대규모 군중조직이 군부와 결탁돼서 반대파를 숙청하는 최대규모의 지역 내전이 발생했다. 1967년 5월 중순 후베이성의 우한에선 53개의 군중조직들이 마구 생겨나더니 6월 3일 조직원 120만을 자랑하는 백만웅사(百萬雄師)의 사령부가 결성됐다. 백만웅사엔 정부 관원, 노동조합, 청년 단체, 노동자, 군인들까지 가세했다.
이에 맞서 과격파 노동자, 농민들로 구성된 공인총부(工人總部) 역시 대규모 연합체를 결성한 후, 관공서의 점거농성, 집단 단식투쟁 등 강력한 조반(造反) 활동을 전개했다. 우한시의 위업 계승과 질서유지를 주장하는 백만웅사와 달리 공인총부는 상하이 1월 혁명의 모델을 따라 지방권력의 전면적 교체를 요구했다.
상호비방, 흑색선전 등 말싸움에서 시작된 양측의 분규는 곧 몽둥이, 창칼을 든 집단의 패싸움으로 커졌다. 5월 말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한 후, 무력충돌은 더욱 과격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문혁 시기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무장 청년들의 모습/ 공공부문>
1967년 6월 6일, 마오쩌둥은 문혁 시절 최고권위를 갖춘 중공중앙 발인의 문서 “중발(中發) [1967] 178”을 반포해서 무장투쟁의 금지를 지시하지만, 무장투쟁은 수그러들 기미조차 없었다. 1967년 6월 24일, 중공중앙은 다시 가두시위 및 무장투쟁 억제, 구속 남발의 자제, 도로·철도·항만 점거 금지, 무기 탈취 및 총기 발포의 금지를 명령했음에도 바로 그날 백만웅사는 공인총부의 사령부로 쳐들어가 25명을 살해하고 사령부를 탈환하는 기습작전에 성공했다.
1967년 “상하이 1월 폭풍” 이후, 군의 투입을 결정한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은 혁명적 좌파군중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문제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난립하는 수많은 군중조직들 중 하나를 딱히 “좌파”라 확정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마오쩌둥의 호위를 부르짖고, 마오쩌둥 사상을 선양하고, 반혁명세력의 척결을 외치면서 불타협의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준(準) 내전의 상황에서 우한 군구(軍區)의 사령관 천차이다오(陳再道, 1909-1993)는 조반파 공인총부 대신 백만웅사를 혁명적 “좌파”로 규정하고 본격적인 군사지원을 결정하는데······. <계속>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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