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흐르는 긴 강물보니 인생무상 느껴지는구나
▲ 중국 강서성 남창시 연강로 공강 가에 있는 등왕각의 모습이다. 등왕각은 당나라 고조 이연의 아들 이원영이 홍주자사가 되어 세운 것이다. 그가 이때 등왕에 봉해졌으므로 등왕각이라 한다.
작가 왕발 '초당 사걸' 중 한 명 … 시 지은 후 배 타고 가다 풍랑만나 29세 요절
형식·기교중시 시풍 탈피못한 작품 … 화려함에도 현실·사실적 내용 동떨어져
왕발(王勃, 647~675)은 노조린(盧照隣) · 낙빈왕(駱賓王) · 양형(陽炯)과 함께 초당(初唐)의 사걸(四傑) 중의 한 명이다.
20대에 첫출사(出仕)를 했던 왕발은, 호기(豪氣)와 패기로 인해 거듭 파면되어 아버지 왕복치가 교지령으로 있는 지금의 베트남으로 가다가 675년 9월 9일 중양절에 강서성 남창시 연강로 공강 가에 있는 등왕각에 올라 <등왕각서>와 <등왕각> 시를 지었다.
시를 지은 후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으니, 29세였다.
<등왕각>
왕발(王勃)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에 솟았는데, 滕王高閣臨江渚(등왕고각임강저),
패옥과 명란 울리던 가무는 파한 지 오래다. 佩玉鳴鑾罷歌舞(패옥명란파가무).
단청한 지붕의 용마루에 남포의 아침구름 날고, 畵棟朝飛南浦雲(화동조비남포운),
붉은 주렴 저녁 때 걷어 올리니 서산에 비 내리네. 朱簾暮捲西山雨(주렴모권서산우).
연못의 구름 그림자는 날마다 유유히 떠가는데, 閑雲潭影日悠悠(한운담영일유유),
만물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몇 해가 지났는가? 物煥星移度幾秋(물환성이도기추).
누각 안에 있던 제자(이원영)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閣中帝子今何在(각중제자금하재),
난간 밖의 장강만이 부질없이 절로 흐르누나. 檻外長江空自流(함외장강공자류).
<등왕각>은 남북조의 유미주의적 경향의 시, 곧 형식과 기교를 중시하던 시풍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이다. 시의 내용이 화려하고 멋지기는 하지만 현실의 사실적 내용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시가 아직도 사대부들의 소일거리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시의 풍격이 형식미의 완성이 있는 성당풍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한 특징이기도 하다.
<등왕각서>는 당(唐) 고종 때 염백서가 등왕각을 중수할 때, 자기 사위 오자장(吳子章)의 글재주를 자랑하기 위해 짓고자 한 것이었으나, 불청객 왕발이 와서 일필휘지하고는 떠나버린 것이다.
그런데 왕발이 지은 서문에는 한시 마지막 구 "檻外長江( )自流"에 글자 한자가 빠져 있었다. 그것을 본 홍주 태수 염백서는 자기와 홍주 사람들을 조롱했다고 여기고 왕발을 잡아오도록 영을 내렸다.
왕발을 잡으러 간 사이 내빈들은 빠진 글자가 아마도 '독(獨)'자 또는 '일(一)'자 일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그들이 오기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였다.
왕발을 뒤좇은 오자장은 그에게 수고비까지 주면서 빠진 글자를 물었다.
왕발이 오자장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 주면서 "홍주 태수가 먼저 본 후에 보아야 한다. 가는 도중에 절대로 손바닥을 펴 보면 안 된다."라고 당부하였다.
그래서 오자장은 손을 꼭 쥐 채로 돌아와서 장인 염백서 앞에서 손을 펴보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손바닥에는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속았다는 생각에 염백서는 울분을 토하면서 당장 왕발을 잡아 오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심부름 갔던 오자장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손바닥을 한참 동안 살피던 오자장은 문득 생각이 스쳤다. '손바닥이 비었다. 아무 글자도 없다. 옳거니 공(空)자다.' '빌 공'이라는 생각에 멈추게 되었다.
그래서 오자장은 장인인 염백서에게 손바닥의 글자는 자기에게만 보인다고 생색을 내면서 그 빠진 글자가 '빌 공'의 공(空)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구가 완성된 것이다.
'난간 밖의 긴 강물은 오늘도 무심히 흐르면서' 그들의 이야기와 인간사 부귀영화 또한 부질없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명시(名詩)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따라 다닌다. 그래서 명시인가 보다.
/인하대학교 교양교육원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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