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들의 눈물
조선 말기에 활동한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의 ‘효자 거묘 살고’.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뻐할 때 기뻐하는 게 조선시대 사람살이의 기 본이었다. [사진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건너 이웃집 애 우는 소리 듣고, 몇 번인가 네가 우나 착각했나니, 지난해 너와 같은 때 태어난 아이, 어느덧 이제 벌써 말을 배운단다. 눈물 참으려 눈길을 떨구었건만 잊으려 해도 다시금 보고 싶구나. 울음소리 삼키고 컴컴한 벽 향했으니 네 어미 알까 두려웠기 때문이라.”
편지·시문에 수없이 나오는 울음
세상 슬픔 공감하며 자신을 닦아
퇴계·율곡의 사단칠정 논쟁 유명
부단한 마음공부로 치우침 경계
조선 문신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어린 자식이 죽은 ‘1월 6일’에 쓴 열 편의 시 가운데 일부다. 그가 애도한 아이 이름은 칠룡(七龍)이다. 칠(七)은 아이의 차례이고, 용(龍)은 태몽으로 용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숙종 원년(1675) 전라도 영암에 귀양 가 있을 때 낳은 아이였다. 20일 만에 죽었다니 태어난 건 12월 16일쯤이고, 그가 7월 18일에 귀양을 왔으니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 그를 따라 영암으로 내려와 칠룡이를 낳았을 것이다. 같이 태어난 옆집 아이가 우는 소리에 죽은 아이를 떠올렸고, 이내 그는 눈물이 났다. 그 먹먹한 슬픔을 감추고 행여나 아내가 깰까 벽을 보고 돌아앉아 소리 죽여 울었다.
조선 말기에 활동한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의 ‘신랑 신부 초례하고’. 슬퍼할 때 슬퍼하고 기뻐할 때 기뻐하는 게 조선시대 사람살이의 기본이었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남자를 엄격한 지아비이자 아버지 혹은 절제되다 못해 경직된 도학자라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장면이리라. 나 역시 그러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사료를 접할수록 그런 편견은 깨졌고, 오랜 기억 속에 묻혀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나의 친가와 외가는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외할아버지는 사돈 동네를 가는 일을 피하셨는데, 어느 날 나를 데리고 친가 동네를 찾으셨다. 외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의형제를 만나셨다. 외할아버지를 맞았던 그분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 건 울음 때문이었다. "좀 자주 오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두 분은 잡은 손을 참 오래도 놓지 않았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의아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조선시대 마지막 세대 사람들이 보여준 만남이었다.
이성과 감정은 대립적 개념 아니다
퇴계 이황
조선시대 편지나 시를 읽다 보면 ‘왜 이 사람들 이렇게 눈물이 많아’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임금의 잘못을 눈물로 비판하고, 은혜에 눈물로 감사하고, 친구가 와서 좋아서 울고, 귀양 가니 울고, 친구나 아내가 죽으니까 울고, 자식을 앞세우고 울고, 이래서 울고 저래서 울고….
이성과 감정의 위계가 만연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이성의 하위에 놓지 않았다. 여기서 이성은 리즌(reason), 감정은 이모션(emotion)의 번역어다. 이성은 수학적 사고능력을 말하는 합리성의 영역이고, 감정은 비합리적 영역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나도 이성적으로 화를 억제하라고 훈련받았다. 화를 잘 내고 잘 우는 나는 이런 훈련에 반감이 있었다. 사람이 화가 나면 화를 내고 슬프면 남자라도 울어야 하는 거 아닐까.
『예기(禮記)』의 예운(禮運)편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인정(人情)이라 하는가? 기쁨·노여움·슬픔·두려움·사랑·혐오·욕망이니,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할 줄 안다.” 좌절이나 감동에는 진한 눈물이 흘러야 하고, 억압이나 만행을 보면 화가 나야 하는 것 아닐까. 『예기』의 말처럼 희로애락 모두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율곡 이이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성과 감정이란 말 대신, 성(性)과 정(情)이라는 말을 썼다. 둘은 대립적이거나 위계가 있지 않았다. 성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또는 신(信)을 더하였는데, 사단(四端) 또는 오성(五性)이라고 불렀다. 성과 정은 마음이라는 텅 비고 신령한 메커니즘이 통솔한다고 보았다.
조선의 웬만한 집이면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맹자(孟子)』는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인(仁)의 단서다’라는 선언으로 인간학의 기초가 됐다. 어린아이가 기어가다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사람은 ‘저걸 어째!’라고 하며 구해준다는 것이다. 그 아이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해서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 욕할까 봐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단순한 만큼 강력했다. 공자(孔子)의 인(仁)은 맹자에게서 인간학적 논리를 갖게 된 셈이다.
성이 움직이면 정이 되는 것이다. 사단의 경우, 인의예지는 성이지만, 그 단서인 측은함·부끄러움·양보심·판단력은 정이다. 사단은 다 좋고 나쁜 데가 없는 상태(純善無惡)다. 칠정은 이와 다르다. 작용하여 상황에 맞을 때는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쁠 때도 있는(有善有惡) 불안정한 상태다. 말이 칠정이지, 이는 정에 꼭 일곱 가지만 있다는 말은 아니다.
성이 정으로 발현돼 상황에 들어맞으면 그것을 중용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발현된 정이 ‘상황에 맞지 않는(不中節)’ 경우도 있다. 예컨대 초상집에 가서 큰 소리로 떠들며 웃는다든지 하는 행동이 그것이다. 정은 사뭇 어긋나거나 과도하거나 멋대로 내달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류의 ‘몹쓸 짓=악’이 ‘순선무악’한 성에 근거한다는 모순 같은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사단조차 ‘부중절’한 경우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 주제가 ‘사단칠정 논쟁’의 배경이다. 퇴계는 이(理)와 기(氣)를 철저히 분리(兩斷)하여 사단과 칠정에 배속시킨다. (理氣는 性情의 우주론적 표현이다) 즉, 사단은 이의 작용이고, 칠정은 기의 발동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조금 곤혹스러운데, 이가 주재자이면서 초월자이고, 게다가 작용하는 힘=에너지이기도 하다면, 기는 도대체 뭐냐는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퇴계는 이의 작용(發)을 주장하면서까지 세속적 욕구와 종교적 순결성을 구별하고자 하였다.
고봉 기대승
고봉과 율곡은 달랐다. 퇴계와 달리 칠정을 인간 본성 밖의 무엇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희로애락은 너무도 명백한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칠정은 유혹이지만 발랄함이기도 하며, 때로 수렁이지만, 창의성의 원천이기도 하므로. 아마 고봉은 퇴계에게 "지나친 경건주의가 아닙니까” 묻고 싶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세대 차이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림이 무수히 죽어 나가던 사화(士禍)의 한복판을 살았던 퇴계와, 이제 사림들이 실력을 갖추고 새 시대를 열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고봉이나 율곡의 세대 차이랄까.
아무튼 뛰쳐 날뛸 수 있는 정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마음밖에 없다. 인간은 ‘위태로운 마음을 가진 존재(人心惟危)’다. 그러나 ‘이치에 맞는 마음은 언제나 미약하다.(道心惟微)’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담을 듯하다가도, 좁아지면 바늘 하나 꼽을 데가 없는 것이 우리네 마음이다. 그래서 발동하기 전에는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발현된 뒤에는 홀로 있을 때도 삼가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고 선현들은 생각했다.
최명길·김상헌의 담배 논쟁이 남긴 것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막 망했던 1644년, 청나라 심양에 억류됐던 김상헌·최명길·이경여는 흡연을 놓고 마음을 풀었다. "소경(蘇卿)께서 눈 드신 지 올해로 삼 년이고, 추자(鄒子)가 봄을 돌려줌 또한 한때입니다. 물과 불은 원래부터 기제괘(旣濟卦·상호 교합) 되나니, 쓰임의 얕고 깊음 그 누가 알겠습니까?” 소경은 한나라 때 흉노에 19년 동안 억류됐던 소무(蘇武)다. 추자는 전국시대 제(齊)나라 추연(鄒衍)인데, 북방을 따뜻하게 하여 곡식을 자라게 했다고 한다.
김상헌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골초였던 이경여와 최명길은 담배 연기를 꺼리던 김상헌에게 시로써 자신들의 담배 연기를 따뜻한 봄바람에 비유하여 흡연을 합리화했다. 백성을 고난에 빠뜨린 자괴감, 조선 지식인이 겪은 자존심의 상처, 눈앞에서 벌어지는 멸시와 추위·굶주림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마음을 추스르는 장면이다. 버티며 사는 일상은 생각보다 많은 함축을 담게 마련이다. 사려 담긴 정감의 언어가 주는 격조가 험지에서 인간임을 잊지 않게 만들어줬을 것이다.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유학과 통하는 분자생물학
조지프 르두
“이성과 감정을 다스리는 마음공부란, 우리가 누구였으며(과거 자아), 우리가 어떻게 되기를 원하거나 어떻게 되는 것을 원치 않는지(미래 자아)를 반영하는 우리 정체성에 대한 과정과 구성을 의미한다.”
조지프 르두(사진) 등 21세기 분자생물학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유학의 언어로 바꾸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집중하거나 기억하는 것(主一無適)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인지적 처리 과정(讀書)은 감정적 각성 상태(常惺惺法)를 동반한다. ‘움직이는 자아(working self)’이다.”
이처럼 분자생물학의 일련의 메커니즘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학의 배움과 같다. 퇴계와 율곡을 비롯한 조선 사람들은 분자생물학의 성과를 직관 혹은 경험으로 이해하고 체득했음이 틀림없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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