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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연승 충무공 “왜군 동향부터 파악하라”

bindol 2021. 8. 27. 05:45

연전연승 충무공 “왜군 동향부터 파악하라”

중앙일보

입력 2021.08.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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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승부 가른 정보전

한국영화 역대 최대 관객(1761만)을 기록한 영화 ‘명량’(2014)에서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 충무공은 무엇보다 첩보전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전투에 앞서 왜군의 동향을 면밀하게 파악했다. [중앙포토]

음력 1518년(중종 13) 8월, 조선 조정에서는 속고내(束古乃)라는 여진족 추장을 체포하는 문제를 놓고 한바탕 논란이 빚어진다. 함경도 회령(會寜) 근처에 살던 속고내는 1512년 부하들을 이끌고 갑산(甲山) 지역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했던 자였다. 당시 조선은 속고내를 붙잡아 응징하려 했으나 그가 도주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6년 가까이 행방이 묘연했던 속고내가 압록강을 건너와 사냥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를 붙잡기 위한 대책회의가 열린 것이다. 회의에 참석한 고위 신료들은 속고내를 처벌해야만 변방의 다른 여진족들도 통제할 수 있다며 그를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란은 체포 작전을 어떤 방식으로 실행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졌다. 이조판서 이장곤(李長坤·1474∼1519)은 함경도 현지에서 대군을 동원하여 잡으려 할 경우, 관련 정보가 사전에 유출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장곤은 당시 한양에 있던 무장 이지방(李之芳)으로 하여금 극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달려가 속고내를 급습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보안(保安)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특공대를 파견하는 작전이었다. 중종과 신료들은 모두 이장곤의 제안에 찬동했다.

“기습작전은 옳지 않다” 사림의 오판

이순신

하지만 특공작전은 당장 언관(言官)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사간원과 사헌부 신료들은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상대할 때는 성의와 신의로써 해야지 불시에 기습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사냥하러 들어온 속고내를 체포할 경우 오랑캐들을 자극하여 더 큰 화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광조는 속고내에게 죄가 있다면 정식으로 군사를 일으켜야지 몰래 기습하는 것은 ‘도적의 술책’이자 ‘패도(覇道)’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장곤 등 대신들은 속고내가 침입한 곳이 압록강 안쪽의 조선 땅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 뒤, 군사작전을 펼칠 때는 정상적인 방식만이 아니라 때로는 상대를 기만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중종은 조광조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비밀 특공작전은 중지됐다.

조광조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士林)들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열렬히 주장했다. 왕도정치에서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인(仁)과 의(義)다. 그들은 성리학의 가르침대로 임금부터 백성까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의리와 도덕으로 무장시켜 공리(功利)를 탐하는 마음을 끊어버려야 이상적인 정치(지치·至治)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국방과 외교정책을 펼칠 때에도 ‘왕도’를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자국의 영토와 백성을 침탈한 외적을 붙잡기 위해 왕과 대신들이 합의했던 특공작전을 ‘도적의 술책’이자 ‘패도’로 규정하고 중지하라고 요구했던 배경에는 이 같은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가안보를 위한 용병술(用兵術)까지 이처럼 교조적이고 근본주의적으로 매도하는 풍토에서 정보(情報)를 중시하고 보안을 강조하는 인식과 자세가 자라나기는 어려웠다.

조광조와 그를 존숭하던 사림들은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맞아 훈구파(勳舊派)와 외척(外戚)들에 의해 죽음을 맞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들은 조정에 복귀하여 집권 세력으로 등장한다. 선조대 사림들은 과거 집권세력이 남긴 적폐(積弊)를 청산하고 왕도정치를 추구하려 했다. 하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사림들이 분열되어 정쟁이 심화되는 와중에 1592년 일본의 침략이 밀어닥친다.

조선 산천 훤하게 꿰고 있던 일본군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왜군과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전사한 충주 탄금대. [중앙포토]

임진왜란은 역설적이지만 사림 세력이 국방과 외교에서 정보와 보안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전쟁 발생 직후 육전(陸戰)에서 조선군이 연전연패하고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했던 데는 양측의 정보 수집과 보안 역량의 차이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세기 초부터 외교·통상 등을 명목으로 조선을 수없이 드나들었던 일본인들은 조선의 산천(山川) 형세와 관방(關防) 시설의 위치 등 지리 정보를 축적했다. 특히 삼포(三浦, 부산·울산·웅천) 등지에 오래 거주하여 조선말까지 구사했던 대마도 출신들은 일본군을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거기에 100여 년 동안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수많은 내전(內戰)을 치렀던 일본군 장졸들의 정보와 보안에 대한 인식은 조선군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신립

반면 200년 가까이 평화가 지속되어 전쟁을 몰랐던 데다 사림들이 지녔던 교조적인 대외인식, 그리고 그와 맞물린 문약(文弱) 풍토 아래서 조선군의 정보와 보안에 대한 인식은 몹시 취약했다. 상주를 방어하던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나 충주에서 적군을 저지하려 했던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 모두 척후병(斥候兵)을 제대로 배치하지 않아 일본군이 접근해 오는 것을 제때 인지하기 못하고, 끝내 참패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물론 조선군 가운데도 예외적인 지휘관이 있었다.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전투에 임할 때마다 초탐선(哨探船)·사후선(伺候船)이라 불리는 수많은 정보 수집선을 활용하여 일본 수군의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 부심했다. 또 이순신 휘하 병사들의 상당수는 바닷가 주민들로서 전라도·경상도의 조류 간만(干滿)이나 암초의 소재 등 해로(海路) 사정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이순신은 이런 부하들을 뛰어난 수군으로 편성·조련하는 데 역량을 발휘했다. 요컨대 자신을 잘 알고 적도 잘 알려고 노력했던 이순신의 자세야말로 해전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정보 수집과 보안 유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조선은 곧 이어 청의 침략을 맞는다.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건주여진인(建州女眞人)들의 정보 수집 능력과 간첩 활동 역량은 매우 뛰어났다. 17세기 초, 누르하치는 만주 지역의 명나라 성(城)들을 공격할 때마다 미리 간첩을 들여보내 내부를 정탐하고 민심을 교란시켰다. 내통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방어 태세가 이완되면서 성들은 누르하치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건주사지(建州私志)』에는 “건주여진인들은 간첩 활동이 워낙 뛰어나서 내통하는 자들 때문에 견고한 성도 앉은 채 함락 당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을 둘러싸고 명과 건주여진의 압박이 심화되고 있던 무렵 광해군이 보여준 정보와 보안에 대한 인식은 이채로운 것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척후와 간첩 활동을 통해 건주여진과 명의 동향을 탐지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조선의 내부 정보와 동향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심했다. 광해군이 이렇게 여느 국왕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선에서 전쟁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일깨운 보안의 중요성 망각

내정 실패에 발목이 잡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 들어선 인조 정권의 정보와 보안에 대한 인식은 크게 후퇴한다. ‘오랑캐’ 건주여진(후금·청)과의 화친이나 타협을 거부했던 인조대 척화신(斥和臣)들은 용병과 관련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교조적인 자세를 드러내기도 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을 밤에 급습하여 물리치자는 주장이 제기됐을 때 척화신들 중에는 “야간에 적을 공격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했던 사람도 있었다. 일찍이 조광조가 속고내를 잡기 위한 특공작전에 반대했던 것의 판박이였다.

1636년 봄, 조선 신료 가운데는 조정의 동향과 분위기를 청 사신 용골대(龍骨大) 등에게 넘겨준 자가 있었다. 반면 청과의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고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던 같은 해 가을, 최명길 등은 청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심양(瀋陽)에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척화신들은 격하게 반대한다. “오랑캐와 화친이 끝난 이상 어떤 접촉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반대의 명분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앞에 두고 내부 보안은 취약한 상황에서 적에 대한 ‘정보’는 없이 ‘태도’만 존재했던 것이다.

요즘은 어떤가. 최근 국가정보원에 의해 ‘충북 간첩단’ 사건이 발표됐고, 지난달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등 국가 핵심 시설에 대한 북한의 해킹 공격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다. 시대와 환경은 달라졌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내부 보안을 철저히 다지고 외부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