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35] 아방가르드는 언제나 고독하다
입력 2021.09.02 00:00
글로벌 시대에는 인재를 유치할 때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공직도 예외가 아니다. 영국은 캐나다 사람인 마크 카니를, 이스라엘은 미국 사람인 스탠리 피셔를 각각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한국은행 총재 배의환은 대한제국 신민으로 태어나 식민지 백성을 거쳐, 미국 시민이 된 뒤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파란만장한 이중국적자다.
1960년 6월 1일~9월 8일 재임한 배의환 한국은행 제4대 총재. /한국은행
그는 원래 조선은행 직원이었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은행원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미지의 세계 미국을 향해 배를 탔다. 높은 급여의 편안한 직장을 팽개치는, 엄청난 도박이었다. 힘들게 고학하여 대학을 마칠 때쯤 진주만 폭격 사건이 터졌다. 일본을 깊이 연구하려는 미 국무부는 일본식 교육을 받은 배의환을 채용하여 하와이의 태평양사령부에 배치했다.
1946년 배의환은 미 군정청 재무장관 특보 즉, 미국인의 신분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와이에서부터 지켜보았던 이승만은 대통령 감이 아니라고 실망한 때문이다. 4⋅19혁명 직후 새 인물을 찾던 허정 내각 수반은 배의환을 불렀다. 반(反)이승만 성향의 금융 전문가였으므로 한국은행 총재로 최적격이었다.
배의환은 곧 세 번째 환멸감을 느꼈다. 입국할 때 공항에서 미국 여권을 제출한 사실을 두고 “이중국적자는 총재 자격이 없다”는 시비가 붙은 것이다. 그것은 민주당 내 구파·신파 힘겨루기의 시작이었다.
국내에 아무 배경이 없던 배의환은 고립무원 속에서 취임 3개월 만에 총재직을 사퇴했다. 역사상 최단 기간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출국하지 않았다. 한일회담 수석대표를 맡아 국교 정상화에 매진했다. 이중국적은 공직자의 애국심과 무관함을 증명한 것이다.
최초의 미국 유학파 총재 배의환이 오늘 사표를 냈다.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그가 이중국적 시비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은 필연이었다. 아방가르드는 언제나 고독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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