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과 후금 사이 중립외교, 내정 실패로 무너졌다
중앙일보
입력 2021.09.10 00:32
광해군의 두 얼굴
광해군은 국정 운영을 놓고 신료들과 충돌하며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병헌이 주연 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의 한 장면. [사진 CJ엔터테인먼트]
1619년 12월, 광해군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찬획사(贊畫使) 이시발(李時發·1569∼1626)과 면담했다. 찬획사란 후금(後金·청)의 위협에 대비하여 군사·외교 대책을 기획하는 막중한 직책이었다. 이시발은 광해군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일본은 같은 하늘을 쳐다보고 살 수 없는 원수(怨讐)입니다만 우리나라는 지금 그들에게 기미책(羈縻策·포용하여 다독이는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하물며 저 후금과는 대대로 원수진 일도 없고 불화(不和)의 단서도 맺지 않았으니 화친해서 우호적으로 지내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오늘의 계책은 신료들을 접견하여 토론하고 여러 논의를 널리 채택하시되 전하께서 재결(裁決)하시면 국가의 대사를 한마디 말만 듣고도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과 국교 재개한 현실주의자
명나라 주무르며 후금과도 화친
무리한 궁궐공사로 재정 밑바닥
독선과 아집에 신하들도 등돌려
내치 흔들리면 외교도 소용없어
진영에 매몰된 대선, 앞날 안보여
당시 조선은 군사적 대결을 한창 벌이고 있던 명과 후금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광해군은 양국의 대결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부심했다. 하지만 명의 압박과 신료들의 채근에 밀려 같은 해 3월, 강홍립이 이끄는 원군을 보내 후금을 공격하는 데 동참했다가 심하(深河)라는 곳에서 참패한 바 있었다. 그런데 명은 패전 이후에도 후금 공격에 다시 나서라고 요구했고, 후금은 자신들 편에 서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키라고 조선을 압박했다. 이시발은 ‘원수’ 일본과도 화해했는데 후금과 적대할 이유가 없다며 그들과 화친하되 신료들과 소통하여 의견을 폭넓게 청취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국방의 중심축 대륙으로 옮겨
1617년 광해군이 창건한 경희궁 전경. 본래 경덕궁으로 불렸다. [중앙포토]
임진왜란을 계기로 원한이 하늘을 찔렀지만 조선은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다. 막부(幕府)와 대마도가 국교 회복을 강하게 요청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이 직면했던 엄중한 대외 환경도 중요한 배경이 됐다. 명과 후금의 대결이 격화하면서 조선은 국방의 중심축을 대륙 방향으로 옮겨야 했다. 대륙에서 밀려오는 위협에 집중해야 할 상황에서 혹시라도 일본이 재침(再侵)할 경우 정면과 배후에서 협공당하는 ‘복배수적(腹背受敵)’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일본에 대해 복수(復讐)가 아닌 우호를 선택하면서 또 다른 측면도 생각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총(鳥銃)·장검(長劍) 등의 성능과 품질을 인지했기에 일본에서 이들 무기를 수입하여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반일(反日) 감정이 들끓고, 후금을 오랑캐로 매도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거스르며 일본과 후금을 포용하려 했던 데는 그의 독특한 이력도 한몫했다고 보인다. 광해군은 조선의 역대 왕세자 가운데 궁궐 바깥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다. 1592년 4월, 왕세자가 되자마자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쟁의 현장을 주유했다. 우선 평안도·함경도·강원도·황해도를 돌며 조정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관민들에게 분전할 것을 촉구했다. 이후에는 선조 대신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주유하면서 명군에 대한 지원 업무를 총괄했다. 1년 이상의 전장 체험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민중의 고난은 물론, 조선의 허약한 현실과 일본의 강한 군사력을 직접 목도했다. 동시에 명군의 실상에 대해서도 나름의 감각을 갖게 됐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광해군 무덤. [중앙포토]
1608년 즉위 이후 광해군은 명과 후금, 그리고 일본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회복하고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려면 대외관계가 안정돼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당장 신료들 대부분은 왜란 당시 은혜를 베푼 ‘상국’ 명의 편에 서서 ‘오랑캐’ 후금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료들은 1619년, 심하전투에서 패한 이후에도 명의 재출병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광해군은 단호했다. 명의 요구대로 원병을 한번 보낸 이상 더 이상의 참전은 불가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후금과 화친을 꾀하는 한편, 명의 재출병 압박을 피하기 위해 부심했다. 우선 조선이 심하전투 참전과 패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명을 도울 여력이 없다고 강조했다. 또 조선이 명편에 섰던 것에 반감을 품은 후금으로부터 보복 침략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명에 호소했다.
당시 요동의 명군 지휘관 중에는 심하전투 당시 ‘조선군이 고의로 항복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해군은 이들의 의심을 풀기 위한 대책도 마련했다. 심하전투 당시 후금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장수 김응하(金應河)를 추모하는 시집, 『충렬록(忠烈錄)』을 편찬한다. 이어 『충렬록』을 요동 지역으로 유포시킨다. ‘조선군이 고의로 항복하기는커녕 김응하처럼 명을 위해 분전했다’는 사실을 중국인들에게 홍보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외교는 사술(詐術)을 피하지 않는다”
충북 진천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이시발 신도비.[사진 문화재청]
광해군은 또한 재출병을 요청하기 위해 입국한 명 사신들이 상경하는 길목에 소복을 입은 여인들을 모아놓고 곡(哭)을 하도록 했다. 처연한 광경을 목격한 명 사신들이 사연을 물으면 “심하전투 당시 전사한 조선군의 미망인들”이라고 소개했다. 명을 위해 참전했다가 조선 사회가 처참한 후유증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사신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재출병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광해군은 “외교는 사술(詐術)을 피하지 않는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약소국 조선이 생존하려면 때로는 상대국을 기만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광해군의 이 같은 자세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1623년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뒤에도 명에서는 “광해군이 우리를 충순하게 섬겼고 공(功)이 많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광해군이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의 외교가 딛고 선 토대는 허약했다. 외교와 국내 정치가 따로 놀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이이첨(李爾瞻) 등 측근들의 정치적 독주와 강공(强攻)을 제어하지 못한 채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계모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는 인륜상의 과오,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저질렀다. 그 때문에 효(孝)를 지고의 가치로 여기던 대다수 사대부의 지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나무·돌·은 받고 벼슬 주기도
광해군은 재정 문제 등을 내세워 명의 출병 요구를 강하게 거부했지만, 정작 스스로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인다. 왕권의 위신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경덕궁(慶德宮·경희궁)과 인경궁(仁慶宮) 등의 건설 공사에 매달렸다. 거대한 궁궐들을 동시에 지으면서 재정에 비상등이 커졌다. 그러자 조도사(調度使)라 불리는 어사들을 삼남(三南)에 파견하여 증세를 독촉했다. 목재와 석재 등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는가 하면 아예 은을 받고 벼슬을 팔기도 했다. 신료들은 ‘공사 규모를 줄여 절약된 비용을 후금을 막는 데 쓰자’고 호소했지만 듣지 않았다. 독선과 아집 속에서 백성들은 아우성을 쳤고, 신료와 사대부들은 등을 돌렸다.
패권국 명과 신흥 강국 후금 사이에서 명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후금과도 잘 지내려 했던 광해군의 의도와 수완은 좋았지만 돌아선 민심과 여론은 비난과 냉소를 쏟아냈다. 내정이 무너지자 광해군도 쓰려졌고, 그의 외교 또한 신기루처럼 허망하게 사라졌다.
광해군 당시와 오늘의 내외 현실을 평행선상에서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패권국과 신흥 강국 사이의 경쟁이 본격화하고 그 사이에서 우리의 외교·안보 상황이 중대한 시험대 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미·중의 경쟁과 대결이 전방위적으로 확산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오늘,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면서도 중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전략은 과연 무엇인가.
요즘 정치권에서는 내년 대선에 내세울 후보를 정하기 위한 경선 일정이 한창이다. 하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향후 우리 외교의 방향과 전략을 둘러싼 진지한 토론의 목소리는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오직 대권을 잡기 위한 정략 차원의 흠잡기나 진영논리에 매몰된 상호 비방이 난무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대권을 잡아도 국론이 심각하게 갈라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분열된 나라는 외교에 성공할 수 없다. 광해군대의 외교가 오늘에 던지는 교훈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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