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에 결전 호소한 선조 “아니면 일본에 항복할 것”
중앙일보
입력 2021.08.27 00:34
임진왜란의 치욕
대하드라마 ‘징비록’(2015)은 류성룡의 동명 저술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전후를 조명했다. 드라마에선 배우 김태우가 선조 임금을 연기했다. 전쟁을 맞아 선조가 보인 행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이 된다. [화면 캡처]
1593년(선조 26) 1월 말, 명군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조선의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 경기도 관찰사 이정형(李廷馨) 등을 개성에 있던 자신의 군진으로 호출한다. 이여송은 류성룡 등 조선 신료들을 무릎 꿇린 뒤 군법을 집행하겠다고 길길이 뛰었다. 류성룡 등이 군량 조달과 공급을 태만히 하여 명군 장병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류성룡은 이여송에게 연신 사죄하면서 눈물을 떨군다.
류성룡이 누구인가. 임진왜란 발생 직후 영의정에 임명된 재상이자 조선의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그런 류성룡에게 명군의 야전 사령관이 곤장을 치겠다고 덤빈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류성룡의 모습이 민망했는지 이여송은 형장(刑杖) 집행을 멈춘다. 하지만 류성룡은 훗날 『징비록(懲毖錄)』에서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고 당시의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왜군과 강화 추진한 중국에 애원
군사력 빈약한 조선의 궁여지책
정유재란 터지자 왕부터 피란 생각
최근 아프간의 비극마저 떠올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 돕는 법”
지도자 무능과 부패 늘 경계해야
이여송의 오만, 류성룡에 “무릎 꿇어라”
이여송은 류성룡 등을 질타하면서 군량 문제를 핑계 삼았지만 본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 5만여 명은 1592년 12월에 조선에 들어왔다.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일본군을 조선에서 저지하여 요동(遼東)을 보호하는 것이 참전의 주된 목표였다. 이여송의 명군은 1593년 1월 7일 평양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전세는 역전됐고,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남쪽으로 후퇴한다. 사기가 오르고 자신감이 넘쳤던 명군은 일본군을 맹렬히 추격한다. 하지만 1월 20일, 파주의 벽제(碧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의 역습에 휘말려 참패하고 만다. 이여송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자신도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는다.
왜군에게 붙잡힌 피로인들에게 돌아올 것을 강조한 선조의 교서.
벽제에서 패한 이후 이여송은 개성으로 물러나 치료와 휴식을 명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명군이 평양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곧바로 한양까지 수복할 것으로 기대했던 조선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류성룡은 매일 이여송에게 사람을 보내 빨리 진격해서 일본군을 물리쳐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여송은 차일피일 미룰 뿐 도무지 진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류성룡이 계속 채근하자 결국 폭발하여 ‘군법 집행’까지 운운했던 것이다.
명군 지휘부는 벽제전투 패전을 계기로 사실상 일본군과의 전투를 포기한다. 그들은 싸움 대신 강화(講和)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병력 손실과 전비(戰費) 부담이 커지고 장병들 사이에서 염전의식(厭戰意識)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또 비록 벽제전투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평안도 선까지 북상한 일본군을 한양 부근까지 밀어낸 이상 자신들의 참전 목표는 이미 달성됐다고 생각했다. 일본군이 명나라를 향해 다시 진격해 올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굳이 일본군과 계속 싸워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너희가 직접 싸워라, 더는 원조 없다”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유숙하던 벽제관. 1593년 1월 이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한 명군은 일본과의 강화에 매달린다.
침략자 일본을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원수(만세불공지수·萬世不共之讐)’로 여겼던 조선에게 명군 지휘부의 입장 변화는 충격 그 자체였다. 선조는 신료들을 명군 지휘부에 보내 빨리 결전해 줄 것을 간청했다. 또 북경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의 실상을 알리고 강화협상의 부당함을 명 황제에게 직접 호소하려 했다. 하지만 명군 지휘부는 요지부동이었다. 빨리 조선에서 손을 떼고 싶어한 그들은 조선이 지닌 일본에 대한 민족 감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명군 지휘부는 싸워 달라고 호소하는 조선 신료들에게 “싸우려면 너희가 직접 싸워라”거나 “우리의 지휘에 따르지 않을 경우 군대를 모두 철수시켜 더 이상 원조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말고는 전력(戰力)이 몹시 부실한 상태에서 조선은 명군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명군 지휘부가 일본과 협상하겠다고 고집하자 선조는 ‘충격요법’까지 구상했다. 일본군에게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조선이 항복하면 일본군이 협상을 그만두고 다시 요동을 향해 북상할 것이고, 그럴 경우 명도 어쩔 수 없이 일본군과 다시 전투를 벌일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계책이었다. 졸렬하기 짝이 없지만, 자위(自衛) 능력이 없는 나라의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류성룡 [사진 규장각]
조선을 배제한 채 이어졌던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은 결국 파탄으로 끝난다. 일본군이 재침(再侵)해 올 것이 확실시 되던 1596년 11월, 홍문관 신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아, 존망의 여부가 전하의 행동에 달려 있는데 중전께서는 날 잡아 떠나실 것이고 경보(警報)가 있으면 전하께서도 움직일 것이라 합니다. 전하께서 마부들을 시켜 황해도로 물자를 나르는 행렬이 길에 이어진다는 소식에 의혹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자거리의 백성들도 쌀을 내서 군수(軍需)를 돕는데 내수사(內需司)의 포목을 은(銀)으로 바꾸라고 명하시니 전하께서는 그 은을 어디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적이 오기 전에 위망(危亡)의 화(禍)가 이른다는 것을 전하께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당시 선조는 일본군이 재침해 올 경우 한양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여겨 한편에서는 북쪽으로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선조가 미리 물품을 옮기고 왕의 개인 금고인 내수사에서 포목을 덜어내어 은으로 바꾸려 했던 사실이다. 백성들은 쌀을 염출하여 군수에 보태는데 왕은 피신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신료들에게서 비판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실제로 1597년 6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일본군이 천안 부근까지 북상하자 선조는 중전과 왕실 가족들을 먼저 피난시키려고 했다. 조정의 고위 신료들 가운데도 가족을 피신시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지방 수령과 무관들도 잇따라 사직서를 제출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왕과 신료들이 먼저 도피한다는 소식에 백성들도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도성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국왕은 의지 없고 신하는 도망갈 궁리”
『징비록』. 사진은 일본에서 간행된 『조선징비록』이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식을 들은 명군 장수 오유충(吳惟忠)은 “나는 7년간 이역을 떠돌며 고생하고 있는데 조선 국왕이 스스로 나라를 버린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조선을 지키며 전비를 허비합니까?”라고 선조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또 명의 병부상서 형개(邢玠)는 조선에 보낸 서신에서 “조선 국왕은 굳은 의지가 없고 신하들은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다”며 조선이 분발하면 돕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명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선조는 할 말이 없었다. 일찍이 명과 일본이 강화협상을 시작할 때부터 명군 지휘부에게 싸워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선조가 막상 정유재란이 터지고 일본군이 다가오자 또 다시 한양을 버리고 피신하려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스스로 앞장서서 일본군에게 맞설 생각은 하지 않고 명군에게만 매달리려 했던 그에게 안팎에서 비난과 질타가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왕으로서의 권위가 더더욱 실추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다행히 전쟁은 끝났지만, 정유재란 무렵 선조와 일부 신료들이 보였던 자세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이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무너지고, 탈레반을 피해 공항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이 겪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될 때보다 더 치욕적’이라며 미국의 오판과 미군의 무책임한 철수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붕괴된 아프가니스탄 정부 고위 지도자들의 행태와 지리멸렬한 군대의 실상을 들으면 할 말을 잃게 된다. 대통령은 차량 네 대에 돈을 가득 싣고 허겁지겁 달아났고, 장부상으로 병력이 30만을 넘고 수십조원에 달하는 미국의 군사 원조까지 받은 군대가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무너졌다고 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 거기에 정파의 분열까지 더해지면서 미국의 천문학적인 원조도 소용이 없었다. “아프간이 아프간을 위해 스스로 싸울 때”라고 했던 바이든 대통령의 냉정한 일갈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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