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소론 충돌한 그때, 인삼 찾아 조선 땅 뒤진 일본
중앙일보
입력 2021.09.2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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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캐시 카우’ 인삼
① 일본 규슈박물관에 있는 인형 인삼과 관련 문서. 18세기 초반 부산 왜관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② 대마도가 조선에서 수입한 인삼을 다시 일본 본토에 판매한 사정을 기록한 ‘인삼시종각서(人參始終覺書)’. [사진 부산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요즘 인삼이 은만큼 귀해서 장사꾼이 몰려듭니다. 함경도 산들은 평소 삼이 난다고 알려졌으니 백성에게 생업으로 채취하게 하면 온갖 재화가 모여 삶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방관이 인삼에 세금을 너무 많이 매겨 산에 들어간 백성이 두려워서 삼을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 여진인은 우리나라에 삼이 많음에도 백성이 캐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매년 8월 누런 인삼 잎이 보일 때마다 두 사람씩 작은 배로 강을 건너와 수풀 속에 배를 숨겨 놓고 산과 계곡을 돌며 삼을 캡니다. (…) 심지어 산촌에 들어가 부녀자들이 모아 놓은 삼을 약탈해 가는데도 변장(邊將)들은 사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습니다. 난리를 겪은 뒤 이런 우환이 더 심해졌는데 이것은 그들이 우리를 무시하기 때문이니 분노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가혹한 세금에 인삼 채취 포기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임진왜란 이후 함경도 지방에서 산삼 채취를 둘러싸고 일어난 정황을 증언한 글이다. 함경도가 산삼 주산지임에도 조선 백성들이 가혹한 삼세(蔘稅) 때문에 채취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 대신 여진인이 산삼 수확철에 두만강과 압록강을 몰래 건너와 함경도 산삼을 마구 캐가고 있다는 것, 그런데도 조선의 변장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인삼을 명약(名藥)이자 영약(靈藥)으로 여겼다. 중국인과 일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 인삼이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속출하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인삼 수입 급증에 부담 느낀 일본
조선인 시켜 한반도 동·식물 조사
인삼 생초 들여와 자국 재배 성공
중·일 인삼수요 폭증, 밀무역 성행
‘일본 극비작전’ 전혀 몰랐던 조선
인삼 수출길 막히며 가치도 하락
조선시대에도 조선 인삼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인삼을 챙기는 데 혈안이었다. 어떤 사신은 의주에서 한양까지 오는 동안 “인삼과 은만 주면 식사나 차 제공도 필요 없다”고까지 했다. 고가(高價)의 조선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 한밑천 챙기거나 요로(要路)에 상납하여 승진 밑천으로 삼으려는 열망이 컸다. 유몽인의 지적처럼 여진족이 조선 땅에 몰래 들어와 산삼 채취에 매달렸던 것도 까닭이 있었다. 인삼은 모피·진주와 더불어 여진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었다.
18세기 일본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그림을 세밀하게 그려 남겼다. 조선 인삼을 구하려는 목적에서다. 역사학자 다시로 가즈이가 쓴 『에도시대 조선약재 조사의 연구』에서 인용했다.
일본에서도 조선 인삼 열풍이 불었다. 특히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전래한 뒤부터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몹시 커졌다. 조선 인삼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풍조까지 생겼다. 1732년(영조 8), 조문명(趙文命·1680∼1732)은 “일본인은 병에 걸렸을 때 조선 인삼을 구하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부산 왜관(倭館)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은 인삼을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면서 온종일 씹는다든가, 자상(刺傷) 등을 입었을 경우 인삼을 씹어 바른다고 할 정도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심지어 ‘가난한 효녀가 병든 부모를 위해 조선 인삼을 구하려고 몸을 팔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일본인이 조선 인삼을 금처럼 귀하게 여기면서 대마도가 떼돈을 벌었다. 대마도는 1674년(현종 15) 에도(江戶·도쿄)에 인삼좌(人蔘座)를 설립했다. 그들은 독점적으로 수입한 조선 인삼을 인삼좌를 거점으로 일본 각지에 판매했다. 전매권(專賣權)을 장악한 대마도는 인삼값을 조작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18세기 초 일본에서 조선 인삼의 소매 가격이 두 배로 앙등했다.
인삼무역으로 번성한 개성상인
한편 대마도로부터 주문이 쇄도하면서 조선 인삼 대부분은 일본으로 수출됐다. 특히 상인이나 역관들은 일본인과 밀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밀무역, 즉 잠상(潛商) 행위가 발각되면 처형될 수도 있었지만 워낙 이익이 커서 근절되지 않았다. 1719년(숙종 45), 통신사(通信使)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귀환 중이던 역관 권흥식(權興式)은 대마도에 이르러 음독자살했다. 그의 짐 꾸러미 속에 인삼 12근이 들어 있었던 데다 일본인과 밀무역한 정황이 발각됐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인삼 무역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개성상인이었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인삼을 매점하여 일본 상인에게 넘겨주고 그 대금으로 은을 받았다. 일본은을 북경으로 가져가 다시 비단·생사 등을 구입하여 일본 상인에게 되팔아 대단한 이윤을 남겼다.
18세기 일본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그림을 세밀하게 그려 남겼다. 조선 인삼을 구하려는 목적에서다. 역사학자 다시로 가즈이가 쓴 『에도시대 조선약재 조사의 연구』에서 인용했다.
대일 수출이 늘면서 인삼은 조선의 ‘캐시 카우(Cash Cow)’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인삼 대부분이 유출되면서 18세기 중반 국내의 인삼 공급이 부족하여 가격이 급등했다. 양반가조차 인삼을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1752년(영조 28),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재상 유만중(柳萬重) 집안도 인삼을 구하지 못해 애태울 정도였다고 한다. 때문에 숙종 연간부터 국내 인삼 수요를 고려하여 대일 수출량을 매년 700근으로 제한하자는 주장, 인삼 채취를 원활히 하기 위해 화전(火田) 경작을 금지하자는 주장, 청나라 인삼을 수입하여 국내 공급을 늘리자는 주장 등 다양한 대책이 제시됐지만 인삼 부족 현상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일본은 인삼 수입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화가 조선으로 유출되자 고민에 빠진다. 일본의 은 생산량은 17세기 이후 점차 감소했다. 그 때문에 막부(幕府)는 1685년 중국과 네덜란드 상선의 무역 쿼터를 제한하여 은의 해외 유출량을 줄이려고 부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1695년 이후로는 종래까지 80%였던 은화(銀貨) 순도를 대폭 낮추는 개주(改鑄) 조처까지 단행했다.
조선 인삼 수입량을 줄이거나 일본 인삼으로 대체하려는 노력도 같은 맥락에서 시도됐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18세기 초까지 일본산 인삼의 경우, 뿌리와 이파리는 조선 것과 똑같지만 먹어봤자 별 효력이 없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다. 당연히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마도는 고민에 빠진다. 조선 상인이 과거에 비해 순도가 훨씬 낮아진 은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대마도는 조선과의 인삼 결제 대금은 예전처럼 순도 80%의 양화(良貨)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막부에 호소한다. 막부는 고민 끝에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 불리는 특주은(特鑄銀)을 조선과의 교역에서 사용하는 것을 허락한다.
“은 유출 막아라” 일본의 고민
일본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초상.
막부는 조선 인삼을 국산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역사학자 다시로 가즈이(田代和生)에 따르면 그 중심에는 8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있었다. 요시무네는 1721년(경종 1) 대마도에 특명을 내린다. 대마도가 운영하는 왜관을 통해 조선의 풀과 나무, 새와 짐승 등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의 동식물을 조사하여 『동의보감』에 실린 약재와 처방을 이해하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요시무네의 진짜 목표는 조선 인삼의 생초(生草)를 입수하는 것이었다. 조선으로 막대한 은화가 유출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인삼 국산화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막부는 대마도와 왜관에 ‘조사 사업’ 수행을 위한 지침을 내렸다. 조선 곳곳의 동물과 식물을 현물로 입수하되 여의치 않으면 그림을 그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대마도는 1721년 조선의 전직 역관(譯官) 이석린(李碩麟)에게 사업 책임을 맡겼다. 이석린의 소개로 상인을 비롯하여 아전·의원·승려 등 다양한 조선인이 왜관과 접촉했다. 이들은 왜관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고 조선 곳곳을 누비며 각종 동·식물을 입수했다. 왜관은 그들이 가져온 동·식물을 측정하고 세밀한 그림을 그렸다. 또 식물 표본과 동물 박제를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다.
‘조사 사업’은 1721년 이후 약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조선 인삼의 생초도 일본으로 반출된다. 막부는 인삼 생초를 일본 곳곳에서 시험 재배한다. 재배를 거듭하면서 18세기 전반 일본은 마침내 조선 인삼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조선 인삼의 대일 수출이 막힌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선으로 들어오던 일본 은의 양도 격감한다. 조선의 ‘캐시 카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는 매우 은밀하게 진행된 ‘조사 사업’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찜찜한 대목이 없지 않다. 1721~1722년에 걸쳐 조선에서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신임화변(辛壬禍變)이라 불리는 격렬한 정쟁이 빚어졌다. 처형과 유배가 잇따르면서 두 정파 사이의 원한과 복수심은 하늘을 찔렀다. 바로 그때, 일본에 매수된 조선인이 전국의 산야 곳곳을 휘젓고 다닌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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