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난자의 한줄로 고전

혼돈의 죽음

bindol 2021. 10. 24. 04:51

일착일규(日鑿一竅) 칠일이혼돈사(七日而混沌死)

하루에 구멍 하나씩 뚫어주었는데 일곱째 날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장자’ 응제왕(應帝王) 편의 우화다. 남해의 임금은 숙이고 북해의 임금은 홀이며 중앙의 임금은 혼돈(混沌)이었다. 숙과 홀이 마침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후의에 보답하고자 상의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7개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혼돈은 없으니 우리가 뚫어줍시다”라고 뜻을 모아 하루에 구멍 하나씩을 뚫어주었는데 일곱째 날에 혼돈이 그만 죽고 말았다. 결국 숙과 홀의 섣부른 친절이 혼돈을 죽게 만들었다. 혼돈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한 그들의 판단착오다. 상대방을 위한 선행일지라도 내 입장이 기준이 돼서는 안 된다. 인간들 유위(有爲)의 행동이 자연의 순박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그 과오를 장자는 이렇게 꼬집었던 것이다.

‘섞을 혼(混) 어두울 돈(沌).’ 굳이 그의 이름을 ‘혼돈’이라고 작명한 장자의 속내를 짚어본다. ‘혼돈’의 사전적 의미는 천지개벽 초에 하늘과 땅이 나뉘지 아니한 상태, 사물의 구별이 판연(判然)하지 않고 모호한 상태라고 한다. 이는 태극의 음양이 나뉘기 이전 무극(無極)의 상태, 분별 이전의 순수한 도(道) 자리다. 인간의 판단, 시비가 붙지 아니한 ‘무분별(無分別)한 혼돈’의 상태야말로 오히려 천성(天性)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천연(天然)을 지키며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無知)일 때, 오히려 편안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 ‘혼돈’을 혼돈 상태로 뒀다면 그는 일곱 구멍이 막힌 채로 천성을 유지하며 잘 살 수 있었으련만.

 


“살아 있는 혼돈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라”는 그의 거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장자는 이처럼 인위(人爲)를 거부하며, 부자유 속의 자유를 부단히 추구했던 사상가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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