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가(孟軻)는 돈소(敦素)하고 사어(史魚)는 병직(秉直)하니라.
맹자(孟子)는 바탕을 도탑게 했고, 사어는 올곧음을 지녔다.
‘천자문’을 지은 주흥사(周興嗣)는 맹자의 ‘돈소’와 사어의 ‘병직’을 들어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일깨운다. 인의(仁義)를 강조한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며 사람의 본바탕인 착함을 더욱 도탑게 해야 한다고 했으며, 춘추시대 위(衛)나라 대부였던 사어(史는 관직, 魚는 그의 字)는 자신이 맡은 일을 늘 살펴보며, 올곧게 지켜야 한다는 공직자의 자세를 몸소 보여줬다. 위나라 임금 영공(靈公)이 어진 현부 거백옥을 쓰지 않고 미자하를 총애했다.
사어가 임종 무렵 자식들에게 말했다. “내가 조정에 있으면서 거백옥을 등용시키고, 미자하를 쫓아내지 못했으니 이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다. 살아서 바로잡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예를 갖출 수가 없구나.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창문 밑에 그대로 두고 빈소도 마련하지 마라.” 그의 아들은 그대로 했다. 영공이 조문 와서 그 까닭을 물으니 아들은 부친의 유언을 임금께 고하고 울 뿐이었다. 영공은 깜짝 놀라 말한다. “이는 내 허물이로다. 사어가 살았을 때 항상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고, 모자라는 사람을 쫓아내려 하더니, 죽어 시체가 돼서도 내게 간(諫)하는구나. 지극한 충성이라 하겠다.” 영공은 곧 빈소를 차리도록 명했다. 그리고 거백옥을 등용해 상경(上卿)으로 삼고 미자하를 쫓아내 멀리했다. 거백옥은 50세에 지나간 49년간의 잘못을 깨닫고, 60세가 되자 지난 59년간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그리하여 그의 덕행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깊어졌다. 영공은 거백옥을 이렇게 칭송했다. “밝기 때문에 절개를 펴지 않으며, 어둡기 때문에 행할 바를 게을리하지 않는다(不爲昭昭信節 不爲冥冥惰行).”
임금의 관용과 그를 일깨운 사어의 ‘시간(尸諫)’ 모두 신실(信實)하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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