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삶에 대한 의혹이 생긴다.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생활, 혹은 일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일까?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것일까?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이런 질문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에 이미 내재돼 있다. 즉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질문은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가속도의 삶이 유발하는 자아이탈 현상, 즉 ‘엑스터시(ecstasy)’ 때문이다.
체코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83)의 소설 ‘느림’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현재, 이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 그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 달리 말해 그는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 인간이 기계에게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했다.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다. 그는 비신체적이고 비물질적 속도, 즉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엑스터시는 그리스어인 ‘엑스타시스(ekstasis)’에서 유래된 말이다. ‘밖에 서다’라는 뜻으로 영혼이 육체를 이탈한 상태를 말한다. 속도에만 매달리는 우리는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다시 자아와 마주하고, 그 자아와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행복해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느림’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나는 마차 쪽으로 천천히 가는 나의 기사를 좀 더 바라보고 싶다. 걸음걸이의 리듬을 음미해 보고 싶다. 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의 걸음걸이들은 느려진다. 저 느림 안에서, 나는 행복의 어떤 징표를 알아보는 듯하다. …제발 친구여, 행복하게나. 난 행복할 수 있는 자네의 능력에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달려 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갖고 있다네.”
해답은 ‘느림’에 있다. 느림에는 우리가 속도에 미쳐 달려나가고 있을 때 절대 보지 못했던 온화한 미소가 숨어 있다. 부디 행복하라. 아니 이제부터 행복할 것을 결심하라. 삶의 속도를 늦추는 순간, 속도의 엑스터시에서 빠져나와 다시 당신의 내면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남훈 경제 경영 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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