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

[이남훈의 ‘고전에서 배우는 투자’]<21>‘나와 너’의 복원

bindol 2021. 11. 2. 16:12

 

시소 타는 사람. 동아일보DB

 

‘오리진(origin)’의 붕괴는 인간관계에서도 필요하다. 관계의 오리진은 ‘나’와 ‘너’의 엄정한 분리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시작된 개인의 발견은 이런 생각을 공고화했다. 이제 ‘나’는 하나의 소우주이며, 누구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사적인 존재다. 또 독립적인 인격과 자유, 권리를 가지는 존재로 인식된다. 외부에는 ‘너’라고 하는 타인이 존재한다. ‘나’와 ‘너’가 분리돼 있고 서로가 침해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사회는 ‘너’가 ‘그것(it)’이 되는 비참한 현실을 가져왔다. 타인은 하나의 수단이 돼 나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사물화돼 인격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비정상적 관계의 오리진이 됐다. 이를 붕괴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 타인을 사물화하고 그들을 이용하며 도구화하는 비인간적인 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가 1923년 발표한 ‘나와 너 (Ich und Du)’라는 책은 이런 관계의 오리진을 붕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는 본질적으로 ‘나와 너’라는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나’만 단독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 없이는 진정한 ‘나’도 있을 수 없고, ‘너’ 역시 ‘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 연계성을 인식하면 ‘너’를 ‘그것’으로 바라보는 도구적 관계론을 넘어설 수 있다.

 

어린이 놀이기구인 시소의 어원은 ‘seesaw’다. ‘보인다’라는 뜻의 동사 see와 과거형인 saw가 결합된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가 높아지면 ‘보이고(see)’, 상대가 높아지면 방금 전에 본 것은 ‘보였던(saw)’ 것이 된다.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see와 saw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인격적 관계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를 붕괴하고 ‘나’와 ‘너’의 관계를 복원해보자. 그러면 당신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 역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남훈 경제 경영 전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