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봄꽃 만발한 '낙선재' 뒤뜰…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죠

bindol 2021. 11. 4. 04:16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쓴 ‘사절복색자장요람’과 ‘국기복색소선’이에요. 조선조 역대 왕과 왕비의 기일이나 국가 기일에 입는 의복을 기록했어요. /문화재청

지난 1일부터 평소보다 더 많은 관람객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찾고 있어요. 문화재청이 창덕궁 낙선재(樂善齋) 뒤뜰을 개방하였다는 소식 때문이에요. 그동안 낙선재 뒤뜰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았거든요. 헌종 임금이 낙선재를 지은 때가 1847년이니, 160여년 만의 개방이지요. 낙선재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 부근에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창경궁 영역에 속했다가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해요. 낙선재 뒤뜰의 꽃 계단에 핀 화사한 꽃들과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꽃담, 굴뚝도 유명하지만, 낙선재에는 특별한 것이 3가지 더 있답니다.

그 첫째는 헌종 임금의 사랑 이야기예요. 조선 제24대 임금인 헌종은 8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어요. 나이가 너무 어려 할머니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지요.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힘겨루기를 하며 세도정치를 펼칠 때였고요. 헌종은 15세가 되어서야 직접 나랏일을 돌보았는데, 첫 왕비였던 효현왕후 김씨가 16세에 세상을 떠나 새 왕비를 맞게 되었습니다. 헌종은 왕비 후보로 간택(★)된 규수 3명 중 김씨 처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어요. 그러나 할머니인 순원왕후의 뜻에 따라 남양 홍씨인 효정왕후를 두 번째 왕비로 들이지요. 마음은 다른 여인에게 가 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효정왕후가 3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자, 헌종은 김씨 처녀를 후궁으로 들입니다. 그녀가 바로 경빈 김씨예요. 헌종은 자신이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하던 낙선재 옆에 석복헌(錫福軒)이라는 건물을 짓고 사랑하는 경빈 김씨가 머물게 했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헌종이 그로부터 2년 뒤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거든요. 헌종이 죽자 경빈 김씨는 낙선재에서 쫓겨났고요.

두 번째는 낙선재가 다른 궁궐 건물과 달리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헌종은 검소함으로 태평성대를 이룬 고대 중국의 순(舜)임금을 본받아 화려한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고 해요. 낙선재라는 이름도 순 임금이 선(善)을 보면 기뻐하였다는 옛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라 짐작됩니다. '선(善)을 즐긴다(樂)'는 뜻으로요.

 헌종이 서재 겸 사랑채로 이용하던 낙선재는 헌종과 후궁 경빈 김씨의 사랑 이야기가 깃든 곳이에요. /문화재청

세 번째는 낙선재에 재미있는 이야기책이 많았다는 거예요. 궁에서 왕비나 후궁, 상궁들이 읽던 소설책이 낙선재에 소장돼 있었어요. 모두 84종 20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지요. 이 중 700여권은 중국 책을 번역한 것이고 나머지 1300여권은 한글 창작소설이라고 해요. 이렇게 낙선재에 보관되었던 소설을 '낙선재본 소설'이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돼 있어요.

[1분 상식] '세도정치'란 무엇인가요?

국왕의 위임을 받은 특정 인물이나 가문이 정권을 잡아 이루어진 정치 형태를 말해요.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 때 홍국영이 정조를 대신해 4년 동안 세도정치를 한 바 있으며, 정조가 죽고 순조 때는 안동 김씨 가문이, 헌종 때는 풍양 조씨 가문이 세도정치를 펼쳤어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는 헌종의 뒤를 이은 철종 때까지 계속되었어요. 특정 가문 세력이 국왕 대신 권력을 행사하면서 이 시기 국왕의 권위는 크게 약해졌습니다.

★수렴청정(垂簾聽政):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이 될 때까지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가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

★간택(揀擇): 조선시대 왕실에서 혼인을 치르기 위해 여러 명의 혼인 후보자를 궐내에 모아놓고 왕 이하 왕족 및 궁인들이 직접 보고 적격자를 뽑던 행사.

지호진 |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