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금실 무늬 옷은 금지" 검소한 왕, 영조의 명령

bindol 2021. 11. 5. 04:57

"게을러지니 방석을 쓰지 않겠다"
스스로 앞장서 사치품 반대한 영조… 즉위 전부터 백성 가까이하며 절약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금실 제작법, 금실 무늬 옷감 금지된 후 사라져

280여 년 만에 금으로 만든 실인 금사(金絲) 제작의 전통이 되살아났어요. 지난달 11일에 문화재청은 국내 최초로 전통 금사 제작 기술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어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섬유복원연구소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4년 동안 연구한 성과이지요.

금사로 옷에 무늬를 새기는 일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기술이었어요. 그러나 조선 후기에 영조 임금이 옷감에 무늬를 넣은 것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금실로 옷감에 무늬를 넣는 일도 사라져갔고, 금실을 만드는 기술도 없어졌죠. 그런데 영조 임금은 왜 무늬를 넣은 옷감을 만들지 못하게 했을까요? 그 이유를 찾아 조선 후기로 역사 여행을 떠나볼까요?

◇옷감에 무늬 넣는 것을 금지하다

1733년. 영조 임금은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어요.

"편리함과 이치란 무엇인가? 곧 검소함이요, 어려움과 사사로움이란 무엇인가? 곧 사치함이다."

신하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당부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도 했어요.

"과인이 이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상의원에서 매년 옷감을 짜는 것을 그만두라 하였다. 이제 베틀도 철거하여라."

 그림=이창우

영조 임금이 상의원에서 베틀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에요. 그것은 옷감에 무늬를 넣는 베틀이었지요. 상의원은 조선에서 임금의 의복과 궁중에 쓰이는 일용품의 공급을 맡은 관청이고요.

영조는 검소함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 왕이었어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백성과 어울리며 소박한 생활을 했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먹는 것에서부터 입는 것까지 검소함을 잃지 않으려 했죠.

◇영조, 검소함을 몸소 실천하다

"백성은 하루 세끼 먹는 것도 어려운데, 왕이라고 어찌 하루에 5끼를 꼬박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조선시대 왕은 아침 6시에 죽이나 미음으로 초조반, 오전 10시에 밥, 국, 김치, 전골 등 기본 음식에 12가지 반찬이 오른 아침 수라, 12시쯤 점심에는 면이나 떡국 등으로 차린 낮것상, 저녁 6시쯤에 12가지 반찬이 오른 저녁 수라, 오후 3시나 밤 9시쯤에 약식 등의 참까지 보통 하루에 5~6끼를 먹었어요. 그런데 영조 임금은 참이나 낮것상을 줄여 하루 3끼만 먹었다고 해요. 여기에 반찬 수도 줄이라고 했죠.

궁궐의 방문 종이가 뚫어지면 손수 종잇조각을 잘라 발랐고, 버선도 해진 데를 기워서 신었다고 해요. 비단으로 만든 요에서는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하며 명주로 만든 이불과 요를 썼다고도 하고요. 영조의 검소함을 잘 알 수 있는 이야기 하나 더 들려줄게요.

◇영조의 검소함을 상징하는 물건

"전하, 이것은 방석이옵니다. 제가 전하의 성품을 생각해 특별히 만든 것이옵니다."

어느 날 호조판서가 영조에게 방석 한 개를 만들어 올렸어요. 영조의 검소한 성품을 잘 아는 호조판서는 방석을 만들 때 무명천에 푸른 물을 들이고 솜을 채워 넣었지요. 그런데 영조는 그 방석을 사흘 동안 깔고 앉아 본 뒤에 도로 호조판서에게 돌려줬다고 해요.

"방석을 깔고 앉아 보니 몸은 편하오. 그러나 몸이 편하면 게을러지는 법이라 방석을 쓰지 않기로 했소. 덕분에 검소한 것은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 아니라 부지런함까지 가져온다는 점을 깨달았으니, 참으로 고맙소."

영조의 말에 호조판서는 물론이고, 다른 신하들까지 크게 감동하였어요. 그 뒤로 호조(조선시대의 관서 중 한 곳)에서는 호조판서가 영조 임금께 바쳤던 방석을 왕의 검소함을 상징하는 기념품으로 보관했다고 해요.

◇영조가 검소함을 강조한 이유는

영조는 무늬를 새겨 옷감을 짜는 것을 금지했을 뿐 아니라, 양반집 부녀자들이 가발을 쓰는 것도 반대했어요. 모두 사치함을 금지하기 위해서였죠. 그렇다면 왜 영조는 사치를 금지하고 검소함을 주장했을까요?

영조는 나서부터 궁궐에서 자라며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가 왕이 된 임금들과는 다른 환경과 형편 속에서 자랐어요. 어머니가 엄격한 과정을 거친 궁녀 출신이 아니라 무수리 신분인 데다가 소론과 노론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론 세력이었던 후궁인 영빈 김씨의 양자처럼 키워졌죠. 한마디로 어렵고 힘든 세월을 겪어내야 했죠. 궁궐 밖에서 백성과 어울려 살며 백성의 고달픈 생활을 알았고, 반대로 백성의 생활은 곤란한데 사치를 일삼는 양반들의 모습을 보게 됐어요. 그래서 백성의 형편을 헤아리는 마음에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고, 이를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들도 따르게 하여 나라의 풍속과 질서를 바로잡고자 한 것이에요. 그 때문에 우리 전통 기술인 금사 제작 기술이 사라졌던 것은 좀 아쉽지만 말이에요.

[함께 생각해봐요]

우리 고유의 독자적인 금사 제작 기술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조상은 우리만의 독특한 멋이 담긴 옷을 만들어 입어왔어요. 예로부터 전해온 우리나라의 고유한 옷은 어떤 것이 있으며, 그 멋과 특징은 무엇이었는지 알아봅시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감수=심연옥(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