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왕건의 고향, 아라비아 상인 드나드는 국제도시였어요

bindol 2021. 11. 6. 04:54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왕건, 궁예 왕위에서 몰아낸 후 918년 새 왕조 고려 건국하고
자신 태어난 개성, 도읍지로 정해
중국·일본·인도 등과 교류하며 국제 무역 중심지로 성장했어요

북한이 1월 6일 핵실험을 한 데 이어 설날 연휴였던 지난 7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어요. 이런 행위가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한다고 본 우리 정부는 북한을 제재하기 위해 북한의 개성(開城)에 있는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했어요. 그러자 북한은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남한 임직원들을 내쫓았지요. 개성공단 폐쇄가 남북 관계를 더욱 나쁘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에 대응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람들도 있지요.

개성시는 판문점에서 8㎞밖에 떨어지지 않은 남한과 가장 가까운 북한의 대도시예요. 개성공단은 만나기 쉽지 않은 남북한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며 소통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경제적 협력을 통해 북한의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끌어내는 지역이었지요. 개성은 우리 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해요. 고려 왕조의 도읍지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과연 개성은 언제 어떻게 고려의 도읍지가 되었을까요?

송악에서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나다

통일신라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할 무렵, 송악(松岳·소나무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으로 개성의 옛날 이름)이라는 지방에는 호족 왕륭이 살았어요. 어느 날 왕륭의 집 앞을 도선대사가 지나가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 삼은 '마(麻)'라고 흔히 불리는 유용한 식물로, 잡곡인 기장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귀한 식물이랍니다. 귀한 식물을 어찌 좋지 못한 터에 심었느냐는 뜻이었지요. 도선대사는 산이나 땅, 강 등의 모양이나 방위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측할 수 있는 풍수지리학에 이름난 승려였거든요.

 그림=이혁

왕륭의 아내가 급히 남편에게 이 말을 전했고, 왕륭은 서둘러 도선대사를 쫓아가 아까 한 말의 뜻을 자세하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어요. 도선대사는 왕륭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지요. "내가 일러 주는 곳에 집을 짓고 살면 내년에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건'이라고 하십시오." 877년 왕륭 부부는 아들을 낳았어요. 그 아들이 바로 왕건이에요.

왕건의 고향 송악은 경기도 북서부에 있는 지방으로 원래 이름은 부소군이었어요. '고려사'에 실린 왕건 설화에 따르면, 왕건의 6대 외조 할아버지인 강충이 부소군을 송악으로 바꿔 놓은 사람이라고 해요. 강충은 부소군 호족의 아들로, 신라 조정에서 출세를 했던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풍수지리에 밝은 통일신라의 군관이 부소군에 와서는 "마을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산에 있는 바위를 가리면 이곳에서 삼한을 통일하는 자가 태어날 것이다"는 예언을 했어요. 그 말을 들은 강충은 부소군 사람들과 함께 산의 남쪽으로 고을을 옮기고, 소나무를 많이 심었답니다. 그래서 부소군이 소나무가 많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의 송악으로 바뀐 거지요.

송악은 예성강 포구와 서해가 가까이 있어 뱃길을 이용하기가 편리했어요. 당나라와 해상 무역을 하기에도 위치가 좋아 부자가 될 수 있었죠.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송악의 지리적 이점 덕분에 재산과 세력을 얻었던 거지요.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신라 왕족의 아들인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한반도의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나갔어요. 이때 송악의 왕륭도 궁예 세력 아래로 들어갔지요. 궁예의 신임을 얻은 왕륭은 "천하를 차지하려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제 맏아들인 왕건을 성주로 삼으십시오"라고 제안했어요. 궁예는 898년 송악을 임시 도읍으로 정했다가 905년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어요. 철원이 궁예의 원래 거점이었기 때문이었지요.

500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왕건은 궁예의 곁에서 묵묵히 후고구려 건국을 도왔어요. 913년 왕건은 공을 인정받아 왕인 궁예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 시중이라는 벼슬에 오르기도 했고요. 궁예는 점점 성정이 난폭해졌어요. 자신에게 남의 마음을 읽는 재주인 '관심법(觀心法)'이 있다고 주장하며 아들과 아내를 죽이거나,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처형하는 등 공포 정치를 폈지요.

궁예가 백성들의 인심을 잃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그러자 홍유, 배현경 등의 신하들은 왕건에게 찾아가 궁예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왕건이 새 왕이 되어 잘못된 통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지요. 918년,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어요.

이듬해인 919년 왕건은 수도를 철원에서 자신의 고향인 송악, 즉 개성으로 옮겨요. 936년 고려가 후백제, 통일신라에 이겨 후삼국 통일을 이루면서 개성도 크게 번성하지요. 왕권을 강화한 광종 때인 960년부터 개성은 개경(開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돼요. 고려가 외국과 활발한 무역을 벌이면서 개경은 중국 대륙의 송나라·요나라(거란)·금나라(여진)뿐 아니라 일본·인도·동남아시아·아라비아 등 여러 외국 상인들이 드나들고 머무는 국제도시가 되었지요.

1392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 조선을 세운 뒤 1394년 나라의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기자 개경은 수도의 지위를 잃어 버리고 개성이 되었죠. 하지만 상업이 발달해 개성 상인은 조선시대에도 유명했답니다. 500여 년 동안 이어진 고려의 역사가 담긴 개성에는 고려 왕조의 궁궐터인 만월대를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어요. 지난 2013년 통일을 이룬 고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역사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답니다.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어린이 한국사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