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의 역사적 장소]
탑골공원서 기미독립선언서 읽고 독립 만세 외치며 3·1운동 시작돼
많은 독립운동가 서대문 감옥 수감… 유관순 열사도 갇혀있다 목숨 잃어
내일은 삼일절이에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탑골공원,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 통치를 받던 우리 민족은 기미(己未)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어요. 그 후 약 2개월간 전국에서 비슷한 만세 운동이 이어졌어요. 만세 운동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하겠다는 뜻을 널리 알린 것이지요. 올해로 삼일절 97주년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린다고 해요. 삼일절 기념행사가 열리는 곳 중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과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독립공원을 들 수 있어요. 과연 이 두 곳은 3·1운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3·1운동 열기 남아 있는 탑골공원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주권을 빼앗긴 뒤, 한국인은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나라 안팎에서 크고 작은 투쟁들을 벌여왔어요. 1918년 만주에서는 독립 운동가 39명이 대표가 되어 독립 선언을 했고, 1919년 2월 8일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이 조국의 독립을 외치며 2·8독립선언을 했어요. 해외에서 들려오는 독립 선언 소식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지사들에게도 큰 힘이 됐어요.
▲ 그림=이혁
든든한 용기를 얻은 민족 지도자들은 고종의 장례식을 이틀 앞둔 1919년 3월 1일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계획했어요. 우선 최남선·손병희·이승훈·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서울의 파고다공원(현재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열기로 결정했어요. 하지만 몇몇 민족 대표들은 여러 이유를 대며 오지 않았고, 남은 대표들은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가는 자칫 흥분한 군중이 일본 헌병과 충돌하여 다칠 수 있다고 염려했지요. 이들은 독립 선언 낭독의 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인사동의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바꾸었답니다.
그때 파고다공원에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모여 민족 대표들이 독립 선언을 낭독하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민족 대표들이 오지 않아 사람들이 머뭇거릴 때, 어떤 사람이 탑골공원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어요. 독립선언서를 인쇄소에서 지방으로 나르는 역할을 맡았던 정재용 선생이었지요. 후일 정재용 선생은 "공약삼장까지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함성과 함께 발로 땅을 구르는 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고 해요.
일제에 억압받아온 우리 민족이 외치는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탑골공원에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 쳤어요. 이렇게 시작된 3·1 만세 운동은 서울 도심 곳곳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두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어요.
파고다공원은 원래 고려 시대에 흥복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어요. 1464년,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크게 지었고, 연산군 때 이곳에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인 장악원을 두기도 했답니다. 1514년 중종 때 원각사 건물이 헐리면서 비석과 10층 석탑만 남게 되었지요. 그 후 1897년 고종의 명으로 영국인 브라운이 이곳을 서양식 공원인 파고다공원으로 조성하였고, 1992년에 탑골이라는 이곳의 옛 지명을 따서 탑골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유지되고 있지요.
◇유관순, 서대문 감옥에 갇히다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외교권을 빼앗았어요. 그 후 일제는 대한제국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발 벗고 나섰고, 한국인들은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을 벌이며 대항했지요. 그러자 조선총독부에서는 독립운동을 벌이거나 일제 정책에 맞서는 한국인들을 가둘 감옥을 만들었어요. 이 감옥이 바로 1908년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경성 감옥(현재 서대문 독립공원이자 옛날 서대문형무소)이에요.
1910년, 일제는 한·일 병합 조약을 강제로 맺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았어요. 일제는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독립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어요. 경성 감옥으로는 모두 가둘 수 없을 정도였지요. 일제는 서울 마포에 새로운 감옥을 짓고 경성 감옥이라는 명칭을 이곳에 옮겨 붙였어요. 원래 서대문에 있던 경성 감옥은 서대문 감옥으로 바꿔 불렀고요. 1919년 전국 곳곳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는 애국지사들을 집중적으로 잡아 서대문 감옥에 가뒀어요. 이를 위해 3000여명을 가둘 수 있도록 감옥 건물을 확장하기도 했지요.
유관순 열사도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한 독립 운동가랍니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만세 운동을 벌이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 갇혔어요. 지금도 서대문 독립공원에는 유관순 열사가 고문을 받고 생을 마감한 지하 감옥 터가 남아 있어요.
서대문 감옥이 서대문 형무소로 이름이 바뀐 건 1923년 때에요. 해방 전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이곳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었지요.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자 서대문 형무소는 서울 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어요. 그리고 1992년 8월 15일 광복절 47주년을 맞이하며 서울 형무소와 독립문 주변이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문을 열게 되지요. 이곳에서 우리는 옥고를 치른 독립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긴답니다.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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