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자기편이라도 의견 안 맞으면 싸우고 갈라서다

bindol 2021. 11. 6. 04:47

[붕당정치 2편]

서인과 맞서던 동인 세력… 강경파 북인, 온건파 남인으로 갈려
서인도 노론과 소론, 나이로 나뉘어

궁중 의례와 반대파 처벌 문제로 당파 간 다툼 빈번, 앞날 어둡게 해

지난주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이야기에 이어, 오늘은 그 뒤로 붕당정치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알아볼까요? 동인이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으로 나뉘고,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게 돼요. 붕당 사이의 비판과 견제는 공론을 형성할 때 도움이 됐지만, 지나친 당파 싸움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어요.

◇동인,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나뉘다

선조 때인 1589년, 정여립이라는 신하가 반란을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도망을 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벌어졌어요. 정여립은 원래 서인의 편에 있었다가 나중에 동인의 편에 서서 서인을 비판했던 인물이었지요. 정여립 역모 사건의 처리는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정철이 맡았어요. 정철은 사건을 확대하여 동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혀요. 반대로 서인은 힘을 얻었고요.

 /그림=이혁

그러나 1591년 서인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게 돼 관직에서 물러나요. 서인이 힘을 잃자 반대로 동인이 힘을 얻게 되었고, 정철의 처벌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로 동인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어요. 이미 수차례 귀양살이하며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지었던 정철, 이번엔 처형 위기에까지 처하게 돼요.

동인 중 이산해와 이발 등은 "정철을 죽이고 서인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폈고, 한편, 유성룡과 우성전 등은 "정철은 유배 보내고 서인들 중에서도 인재는 조정에 등용해야 한다"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주장을 했어요. 정철의 처벌은 유배로 결정되었고요.

이산해와 이발을 따르는 사람들을 북인이라고 불렀는데, 이산해의 집이 한강 북쪽이었고 이발의 집이 북악산 밑에 있어서였어요. 유성룡과 우성전을 따르는 사람들은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북인과 남인은 학파에서도 조금 차이가 있었어요. 원래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 출신들인데, 북인은 그중에서도 조식과 서경덕의 제자들이 중심이었고, 남인은 이황의 제자들이었죠.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에는 북인이 권력을 잡아요. 북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한 정철을 비판한 적 있는데, 어떻게 광해군의 신임을 받았을까요? 북인 중에는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소북도 있었지만,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소북파를 이겨요.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개방적인 외교정책이 북인과 잘 맞았거든요.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이번에는 권력이 서인들 차지가 되지요. 서인들은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고는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 능양군을 왕으로 세웠어요. 남인들은 이에 뜻을 함께했고요.

◇상복 입는 예절이나 반대파 처벌 두고 싸워

1659년 효종 임금이 죽어 현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1674년 효종 임금의 왕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서인과 남인 사이에 두 차례 다툼이 벌어졌어요. 그 이유는 상복을 입는 문제 때문이었죠. 이렇게 궁중 의례나 예절에 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예송논쟁'이라고 해요. 첫 논쟁 때는 서인, 두 번째 논쟁 때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어요. 서인과 남인의 세력 싸움이 이어지다 숙종 때 남인이 권력에서 물러나는 사건이 벌어져요.

1680년 남인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허적이 자기 집에서 열린 잔치에 궁중에서 쓰던 천막을 왕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맘대로 빌려갔다가 숙종에게 밉보이게 되거든요. 허적은 이 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몇 달 뒤에는 허적의 아들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서인에게 고발당해요. 이때 허적을 비롯한 많은 남인이 죽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지요.

송시열 등 주로 나이 든 서인들은 남인을 강경하게 처벌하자고 했지만, 윤증을 비롯한 젊은 서인들은 남인을 너무 강력하게 몰아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어요.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지만 송시열이 늘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한다며 스승을 비판했지요. 결국 서인들은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나이 든 신하들과, 윤증을 비롯한 젊은 신하들이 모인 두 세력으로 나누어져요. 나이 든 세력을 늙을 노(老)를 써서 '노론', 젊은 세력을 젊을 소(少)를 써서 '소론'이라고 했지요.

붕당정치는 때로는 상대방을 비판하고 인정하며 정치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했지만, 너무 심하게 권력 다툼을 벌여 나라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영조와 정조는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탕평책을 폈지요.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