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참배하러 행차한 정조, 배 36척 이은 '배다리'로 한강 건너
배 내놓은 사람에겐 여러 혜택 부여… 징 치는 억울한 백성 달래기도
연산군 "사냥 갈 테니 배다리 놔라" 800척 동원해 백성들 원성 컸죠
지난 10월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수원시는 지난 1795년에 있었던 조선 22대 왕 정조의 능행차를 재현하는 행사를 가졌답니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수원 화성을 짓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한 뒤 참배를 다녔는데, 이를 능행차라고 해요. 정조는 1789년부터 1800년까지 총 13차례에 걸쳐 능행차를 했는데, 한 번에 3~5일을 넘지 않았어요. 하지만 1795년에 있었던 능행차는 무려 8일간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묘 참배와 함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함께 했기 때문이었지요.
지난 행사는 1795년의 능행차를 그대로 재현하였어요. 조선시대 의상과 행색을 갖춘 연기자 3100여 명과 말 400여 필이 동원되었고, 왕의 행렬이 배다리를 건너 한강을 지나는 모습도 재현해 많은 시민의 눈길을 끌었답니다.
◇효심을 다하고 민심도 얻은 정조
정조가 건넜던 배다리는 실학으로 유명한 다산 정약용이 설계했어요. 정조의 지시로 정약용은 과학적인 방법과 기구를 사용해 배 36척을 이은 배다리를 만들었지요.
정조는 배다리를 만들 때에도 백성들의 사정을 살폈어요. 배다리에 사용할 배를 강제로 동원하지 않고, 배다리에 쓸 배를 내놓는 선주(船主·배의 주인)에게 세곡이나 소금을 운반할 수 있는 혜택을 주기로 약속했답니다. 이에 많은 선주가 자신의 배를 배다리에 쓸 수 있게 내놓으려고 애를 썼다고 합니다.
▲ 그림=정서용
능행차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 행사이자 백성들을 위한 행사이기도 했어요. 능행차에 맞춰 백성들은 잔치를 벌여 축제 분위기로 행차한 국왕을 맞이했어요. 이에 맞추어 정조는 격쟁(擊錚)을 통해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억울한 사연을 해결해주거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기도 했답니다.
사실 정조의 능행차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관리도 적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효심과 백성들을 헤아리는 마음을 함께한 능행차는 왕실과 백성 모두의 축제가 되었지요. '손해는 군왕이 보고 이익은 백성이 얻어야 한다'는 정조의 신념을 엿볼 수 있는 행사였기도 해요.
◇사냥을 위해 배다리를 놓은 연산군
정조처럼 배다리를 놓고도 백성의 원망과 노여움을 산 임금도 있었어요. 바로 조선 10대 왕 연산군이에요.
기이한 행각으로 유명한 연산군은 청계산으로 사냥을 나가는 걸 아주 좋아했답니다. 당시 궁궐에서 청계산으로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연산군은 사냥을 나갈 때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게 지시했어요. 이를 위해 동원된 작은 배가 무려 800척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생업에 나서야 할 배들이 임금의 취미 생활에 동원된 것이죠.
연산군은 자신의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금표'를 세우고 금표 내에 있는 민가를 강제로 철거해 무고한 백성들을 내쫓기도 했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백성들의 원성과 분노가 아주 컸겠죠?
보다 못한 신하들이 연산군에게 쓴소리를 하였지만 연산군은 이런 말들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한번은 영의정이었던 한치형이 "전하, 지금 청계산에서 사냥을 하시면 그곳의 농부들이 농사지은 벼를 대부분 수확하지 못했을 것인데 자칫 사람과 말이 벼를 밟아 손상시킬까 염려됩니다"라고 아뢰었어요. 당시 연산군이 사냥을 나서면 병사와 노비가 5만명이나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짐승을 쫓아 논과 밭을 헤집고 다니면 그야말로 쑥대밭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치형이 이렇게 아뢴 것이죠.
하지만 연산군은 "지금이 바로 사냥할 시기이다. 백성들이 수확을 하지 않은 것은 백성들의 잘못이니 이 때문에 사냥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답했어요. 백성들의 삶이나 형편을 헤아리기는커녕 자기 때문에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의 책임을 오히려 백성의 탓으로 돌린 거예요.
이 외에도 신하들이 인사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잘못된 부분을 아뢰어도 연산군은 '불청(不聽)·부답(不答)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요. 신하들이 이야기를 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듣지도 않고 답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렇게 귀를 막고 폭정을 계속하던 연산군은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격쟁이란?
격쟁(擊錚)의 원래 뜻은 ‘징이나 꽹과리를 침’입니다. 조선시대에 ‘격쟁’은 원통한 일을 당한 백성이 국왕의 행차 때 징이나 꽹과리, 북을 쳐 왕의 시선을 끈 뒤 자신의 사연을 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을 뜻했지요.
조선 전기에는 격쟁과 비슷한 취지로 백성이 북을 쳐 임금에게 직접 고하는 신문고 제도가 있었어요. 그런데 16세기 무렵 중종과 명종이 격쟁을 관행적으로 행하면서 신문고 제도를 대신하게 되었답니다.
신문고 제도는 본래 취지와 다르게 실제로는 한양에 사는 문무 관리들만 이용할 뿐 하층민과 지방 백성은 신문고를 이용하기 어려웠어요.
이에 임금들은 행차 때마다 일반 백성과 지방에 사는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과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수단으로 격쟁을 이용하게 되었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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