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경주']
일반 백성도 기와집 짓고 숯 사용, 8세기엔 '90만명 살았다' 기록 있어
1000년 신라의 수도로 번성… 외제품 사치 심해 금지령 내리기도
9월 지진 후 사람들 발길 '뚝'… 최근엔 관광객 수 다시 늘어났대요
지난 9월에 발생한 큰 지진과 뒤이은 태풍으로 역사와 관광의 도시 경주가 큰 어려움을 겪었어요. 불국사 다보탑을 비롯해 여러 문화유산이 피해를 입었고, 지진에 대한 공포로 경주를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지기도 했지요.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난 지금 경주 시민들이 피해 복구 작업에 힘을 모아 어느 정도 안정된 모습을 찾으면서 끊겼던 관광객의 발길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고 해요.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찾는 학생과 외국인 관광객 수도 다시 늘어나는 추세라고 합니다.
오늘은 경주가 '신라의 서울'로서 과거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해요.
◇월상루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모습
서기 880년 9월 9일, 신라의 제49대 헌강왕이 대신들을 거느리고 월상루에 올랐어요. 월상루는 신라의 왕성인 반월성의 남동쪽 끄트머리 높다란 곳에 지은 누각(樓閣)이랍니다. 도읍지(都邑地·한 나라의 서울로 삼은 곳)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신라 왕실 사람들이 자주 잔치를 벌였던 장소였지요.
헌강왕이 그곳에서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백성들의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고 합니다. 이에 헌강왕은 국정을 총괄하는 시중(侍中·집사부에서 가장 높은 벼슬) 민공에게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민공은 "저도 그렇다고 들었다"고 답했고, 다른 대신들도 "임금이 어진 덕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헌강왕은 기뻐하며 대신들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 그림=정서용
당시만 해도 기와는 아주 귀한 지붕 재료였고, 연기가 많이 나는 장작 대신 사용한 숯도 지금처럼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평범한 백성도 기와로 집을 짓고 숯으로 밥을 해 먹을 만큼 도읍지가 풍요로웠기에 헌강왕이 크게 기뻐한 것이죠.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일화에 나오는 '서울'은 바로 경주입니다. 왜 신라의 도읍지를 경주라고 하지 않고 서울이라고 했냐고요? 서울은 현재 대한민국 수도의 이름이지만 '수도'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해요. 경주는 원래 '서라벌·서나벌·서야벌' 등으로 불렸는데, 여기서 서울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답니다.
서라벌은 '쇠벌', 즉 '쇠를 만드는 곳'이란 뜻이 있다고 해요. 그래서 옛 사람들은 서라벌을 금성(金城)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서라벌'의 뜻이 '새로운 땅' 또는 '성스러운 곳'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어요.
◇수십만 명이 살았던 세계적인 도시
서라벌은 신라가 건국된 기원전 57년부터 멸망에 이른 935년까지 무려 약 1000년간 신라의 도읍지로 번성하였어요.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신라가 전성기를 누린 8세기 무렵 서라벌에는 황금을 입힌 저택이 39채나 있었고, 가구 수가 17만8936호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 가구당 평균 5명 정도가 살았다고 가정해도 지금부터 1300년 전 무려 90만명이 서라벌에 살았다는 것이죠.
"경주의 넓이로 보아 90만명이 살기는 어렵고, 17만8000호가 아니라 17만8000여 명이 살았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동시대에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는 극히 드물었답니다. 비슷한 시기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던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인구수가 30만~4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서라벌이 얼마나 큰 번영을 누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요.
서라벌은 일본,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까지 활발한 교역을 했던 국제도시이기도 했어요. 머나먼 콘스탄티노플에서도 6~8개월이면 서라벌에 교역품이 도달했다고 합니다. 세계 각지에서 넘어온 외제품이 너무 많다 보니 9세기 초 흥덕왕은 부유한 귀족층의 외제품 사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어요.
◇고려 때부터 경주라고 불리게 돼
서라벌이 경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예요. 935년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김부)이 고려의 왕 왕건을 찾아가 항복하자 왕건이 경순왕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큰딸인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냈어요. 대신 신라란 이름을 없애고 서라벌이라는 이름도 경주(慶州)라고 고친 뒤 김부를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해 경주 일대를 다스리게 했답니다.
☞'사심관'이란?
고려시대에 공신이나 지방 호족들이 각자 자신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 관직이에요.
935년(태조 18년) 태조 왕건이 고려에 항복한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그 지방을 다스릴 수 있게 한 데서 비롯되었어요.
고려 초기에 공신들은 대부분 지방 호족 출신으로 자신의 출신 지역에 전통적인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어요.
왕건은 공신들의 세력 기반을 이용해 지방 호족 세력을 달래고 민심을 수습해 새로 건국된 고려에 대한 반감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심관 제도를 활용했답니다.
사심관은 지방행정의 실제 업무를 담당한 향리들을 감독하며 신분의 구별을 가리고 부역의 공정성을 살펴 풍속을 바로잡는 임무를 맡았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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