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와 재상]
명종이 준 산삼 20근 먹고 벼슬길… 임진왜란 등 위기 속 나라 안정시켜
백성 세금 부담 더는 '대동법' 건의, 왕에게 쓴소리하다 유배당하기도
고구려 국상 을파소, 진대법 실시… 굶주린 백성 보살펴 존경받았죠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일 정세균 국회의장을 찾아가 "국회에서 추천하는 총리를 임명해 실질적으로 내각을 통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이에 따라 누가 차기 국무총리를 맡을지가 국민들의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행정부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고 대통령의 명을 받아 정부 부처를 관리한답니다. 대통령에게 특별한 사정이나 사고가 생겼을 때는 대통령의 권한을 임시로 이어받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해요. 우리 역사 속에도 고대 삼국시대부터 국무총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관직들이 있었어요.
◇진대법으로 백성을 도운 국상 을파소
고구려는 신대왕 때 '국상'이라는 최고 관직을 만들어 지금의 국무총리와 같은 역할을 하게 했어요. 고국천왕 때 국상을 지낸 을파소는 '진대법'을 실시해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답니다.
진대법이란 흉년이 들었거나 먹을 것이 부족한 시기에 나라가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곡식을 수확하는 가을에는 백성이 빌린 곡식을 나라에 갚도록 하는 법이에요.
신라는 법흥왕 때 '상대등'이라는 최고 관직을 만들었어요. 선덕여왕 때 상대등이었던 비담은 "선덕여왕이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이때 김유신 장군은 비담의 반란을 진압해 공을 세웠고, 무열왕 때에는 상대등에 임명되어 삼국 통일을 이끌었답니다.
백제는 전지왕 때 만들어진 '상좌평'이라는 관직이 국무총리와 같은 역할을 했어요. 고려 시대에는 최고 중앙 정치기구였던 중서문하성의 우두머리인 '문하시중'이, 조선에서는 의정부의 '영의정'이 국무총리와 비슷한 역할을 했답니다.
◇영의정만 다섯 번을 한 이원익
영의정 하면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가 떠오르지요? 그런데 황희 못지않게 영의정으로서 임금의 신뢰와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 있답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정묘호란과 같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안정과 민생(民生)을 위해 힘쓴 오리(梧里) 이원익이에요.
이원익은 키가 무척 작아 다음과 같은 민간 설화가 전해진답니다. 명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준경은 이원익을 관리로 추천하며 "워낙 몸이 허약해 적어도 산삼 20근은 먹어야 하지만, 가난하여 그러질 못한다"고 말했어요. 인재를 찾던 명종은 산삼 20근을 이원익에게 내주었고, 이원익은 왕이 내린 산삼을 먹고 건강을 찾아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지요.
▲ 그림=정서용
그러던 어느 날 신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명종이 이준경에게 "그때 천거했던 이원익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이준경은 "워낙 작아서 발돋움하셔야만 겨우 보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어요. 발돋움해 조그마한 체구의 이원익을 본 명종은 "아까운 산삼 20근만 날려버렸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해요.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이원익이 여러 분야에서 활약을 펼치자 선조는 "선왕(先王)께서 잃어버린 산삼을 이제야 찾았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이원익은 세 명의 임금(선조·광해군·인조)을 섬기는 동안 영의정만 다섯 번을 지냈어요. 영의정을 하는 동안에도 청렴함을 잃지 않아 비바람조차 제대로 막지 못하는 오막살이 초가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광해군 때 이원익은 영의정으로서 백성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을 건의해 경기도에서 대동법이 실시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했어요. 신념과 원칙을 지켰던 이원익은 광해군과 인조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목숨을 걸고 이를 반대하다 관직에서 쫓겨나 유배당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당파를 떠나 나라와 백성을 위해 힘썼기 때문에 관리와 백성 모두 이원익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육도 대동법 실시를 위해 평생 동안 노력했어요. 그는 "본인을 쓰려거든 대동법을 시행하시고, 아니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마십시오"라고 임금에게 아뢰기도 했답니다. 김육은 고향에서 10년 동안 농부로 살며 백성의 어려움을 직접 겪었고, 영의정이 된 후 이런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한 거예요.
☞대동법이란?
조선 시대 백성들이 나라에 바쳐야 할 세금 중 ‘공납’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각 지방의 특산물(공물)을 집집마다 일정량씩 나라에 바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지방에 공물의 종류와 내야 할 수량이 정해지면, 공물이 제대로 생산되지 못하는 사정이 생겨도 그 지방의 백성들은 다른 고장에서 공물을 구해서라도 공납을 해야 했어요.
대동법은 공납을 공물 대신 쌀로, 그것도 각자 소유한 땅의 크기에 따라 내도록 한 제도예요.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가난한 백성들은 공납에 대한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고, 많은 땅을 소유한 양반이나 지주층의 부담은 늘어났지요. 그래서 양반과 지주들이 심하게 반대한 탓에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약 100년이 걸렸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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