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수양대군, 계유정난 일으켜 어린 단종 몰아내고 세조로 즉위
단종 복위 운동 준비하던 충신 6명, 계획 들통나 체포 후 처형당해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자리엔 사육신 기리는 '육신사' 있었대요
주말 따뜻한 봄날을 즐기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는 분들이 늘어났대요. 현충원에 잠든 호국 영령을 추모하러 온 분도 있지만, 현충원에 핀 봄꽃을 보러 온 분들도 많이 있지요. 그런데 나들이객 중에는 현충원의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묘비를 밟으며 뛰어놀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심지어 술을 마시며 떠드는 분도 있었대요. 여러분은 엄숙하고 경건한 현충원에서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 믿어요.
◇현충원 자리에 있던 육신사
국립서울현충원은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국군 장병들의 묘지로 1957년에 마련되었어요. 처음에는 국군묘지로 조성되었지만 이후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경찰관, 예비군과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운 구한말 의병과 애국지사 등이 모셔져 현재 16만5000여명의 호국 영령이 이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지와 박정희·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도 국립서울현충원에 있어요.
▲ /그림=정서용
현충원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는 육신사(六臣祠)라는 사당이 있었어요. 육신사는 조선시대 자신이 모시던 임금을 위해 충절을 지킨 여섯 신하의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위패. 죽은 사람의 혼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김)를 모신 곳으로, 여기서 여섯 신하는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조선 6대 임금 단종을 향한 충절을 굽히지 않다가 죽임을 당해 '사육신(死六臣)'이라고 불려요.
단종은 1452년 아버지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어요. 어린 아들이 걱정되었던 문종은 죽기 전 황보인·김종서와 집현전 학사였던 성삼문·박팽년 등에게 "아들을 잘 보필해달라"는 당부를 유언으로 남겼지요.
하지만 이들은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의 야심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과 김종서를 제거하고 조정의 권력을 모두 장악하였어요. 어린 단종은 하루아침에 허수아비 왕이 되고 말았지요. 단종을 지키던 신하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 한명회의 강요를 이기지 못한 단종은 1455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수양대군이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되었어요. 단종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정도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단종의 복위를 꿈꿨지만…
힘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세조를 보며 분노한 사육신은 1456년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는 단종 복위 운동을 준비하였어요. 하지만 복위 운동을 실행하기도 전에 계획이 새어나가면서 이들은 역모죄로 체포되었습니다. 화가 난 세조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을 직접 심문하였어요.
"너희들은 어찌하여 과인의 녹을 받으면서 역모를 꾀하였느냐?"
그러자 사육신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리, 소인들은 나리의 신하가 아니기에 나리의 녹을 받은 적이 없소이다!"
사육신이 세조를 '전하'라고 부르지 않고 '나리'로 부른 것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임금은 단종뿐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단종을 향한 충절의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박팽년은 심한 고문을 받아 옥에서 목숨을 잃었고, 성삼문·이개·하위지·유응부는 비참하게 처형당했어요. 유성원은 체포되기 전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육신이 죽고 난 다음 해 단종도 강원도 영월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육신이 죽고 난 뒤 이들의 고귀한 충절에 감동한 남효온은 주변의 만류에도 이들의 이야기를 전기로 적었어요. 임금을 향한 충절을 지킨 사육신의 행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였지요. 여섯 신하가 사육신으로 불리게 된 것도 남효온이 쓴 '육신전(六臣傳)'이 세상에 알려진 덕분이었습니다. 세조 때는 역적으로 몰렸던 사육신은 조선 중기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 '충절을 지켰던 진정한 신하'로 재평가되어 칭송받게 되었지요.
◇사육신묘에 얽힌 이야기들
하지만 지금의 현충원 자리에 있던 육신사가 언제 생겼다가 사라졌는지,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요. 사육신묘는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세조 밑에서 벼슬하기를 거부했던 여섯 신하(생육신) 중 한 사람인 김시습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숙종 때 사육신묘 부근에 '민절사'라는 사당이 생겼다가 '민절서원'으로 바뀌었다는 기록과 정조 때 사육신묘 근처 길가에 이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어요.
대구 달성군에도 '육신사'라는 사당이 있어요. 사육신의 후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팽년의 후손이 숙종 때 박팽년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은 곳입니다. 처음에는 박팽년의 위패만 모셨는데, 박팽년의 후손이 사육신 모두가 사당 문밖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꿈에서 본 뒤 나머지 5명의 위패도 함께 모셔 육신사가 되었다고 해요.
♣ 바로잡습니다
▲24일 자 A28면 '뉴스 속의 한국사' 중 '육신사(六臣詞)'는 '육신사(六臣祠)'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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