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패기 넘친 20대 왕, 영토 크게 넓히며 기념비 세웠어요

bindol 2021. 11. 7. 05:08

[진흥왕순수비]

신라 진흥왕, 백제 성왕과 손잡고 고구려 공격해 한강 유역 빼앗아

100년 나제동맹 깨고 백제 기습해 관산성 전투 승리하며 '승승장구'
자신의 업적 알리는 순수비 세워

최근 일본에서는 7~8세기 고대 비석 3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한대요. 그런데 얼마 전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을 맡고 있는 마에자와 가즈유키 전 요코하마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한국을 방문해 "비석 3점은 신라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라에서 건너온 이주민이나 그 후손이 직접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어요. 특히 비석 3점 중 711년 무렵에 만든 '다고비'라는 비석은 신라 진흥왕순수비 중 마운령비를 빼닮았답니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 때 세운 4개의 비석입니다. 이 중 마운령비는 568년 지금의 함경남도 이원군과 단천군 경계에 마운령이라는 고개에 세워진 비석이에요. 진흥왕 때 신라가 이미 함경남도에 진출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지요. 삼국 중 가장 늦게 기지개를 켠 신라는 진흥왕 때 영토를 대거 확장하고 이를 기념하는 순수비를 곳곳에 세웠답니다.

◇백제와 손잡고 한강 유역을 빼앗다

오늘날 경주 일대에서 형성된 신라는 건국 이후 줄곧 백제, 고구려에 뒤처져 있었어요. 제22대 지증왕 무렵에서야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왕의 권력을 키우면서 고대국가로서의 틀을 제대로 갖추었지요.


 /그림=정서용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신라를 '고구려와 백제의 눈치를 보던 나라'에서 '당당하게 그들과 맞서 삼국 통일을 꿈꾸는 나라'로 성장시켰습니다. 신라는 진흥왕의 강력한 영토 확장 의지와 뛰어난 전략 덕분에 영토를 넓히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어요.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것이 국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강 유역은 교통이 편리하고 농사가 잘될 뿐 아니라 한반도 중심에 위치하여 세력을 넓히기 좋은 요충지였기 때문이었죠.

마침 강대국이던 고구려는 왕위 다툼으로 내분을 겪고 밖으로는 돌궐의 침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백제의 성왕이 진흥왕에게 "함께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제의를 해왔어요. 당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을 막기 위해 100년 넘게 '나제동맹'을 맺고 있었답니다. 한강 유역을 노리던 진흥왕은 성왕의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551년, 백제와 신라는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았어요. 두 나라는 한강 유역을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습니다.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는 한강의 상류 지역을 차지하였지요.

◇네 곳에 순수비를 세우다

그런데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진흥왕은 나제동맹을 깨트리고 백제를 기습 공격해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해버렸어요. 이미 백제를 꺾을 힘이 있다고 판단한 진흥왕이 의리 대신 실리를 택한 것이지요.

화가 난 백제는 554년 대규모로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러 나섰습니다. 두 나라 군대는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길목에 있는 관산성(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국가의 운명을 걸고 치열한 한판 승부를 벌였어요. 결과는 신라의 대승이었습니다. 백제군은 대패해 달아났고, 심지어 직접 군대를 지휘하던 성왕은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 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어요.

관산성 전투를 계기로 신라는 백제를 누르고 한강 유역을 확고히 차지하며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 나갈 수 있었습니다. 556년에는 함경남도까지 영토를 넓혔고, 562년에는 이사부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이 고령 지방에 있던 대가야를 무너뜨리고 낙동강 너머 가야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삼았어요.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나라가 생겨난 뒤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진흥왕의 나이가 고작 20대였으니 그의 용맹과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요.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가 크게 넓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561년 가야의 영토였던 경남 창녕을 직접 둘러본 뒤 창녕 척경비를 세웠어요. 이어 568년에는 한강 유역과 함경남도 함흥 등 자신이 개척한 영토를 직접 둘러보며 민심을 살피고 백성을 위로하며 상을 내려주었습니다. 더불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북한산과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웠어요.

[임금의 업적 알리는 비석 '순수비']

순수비(巡狩碑)는 임금이 살피며 돌아다닌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진흥왕은 자신이 손수 넓힌 영토를 돌아보고 나라의 위세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한반도 네 곳에 순수비를 세웠지요.

그래서 순수비는 주로 임금의 업적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당시 왕을 수행했던 신하의 이름과 관직 등도 나와 있어 신라의 신분제와 관제 등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지요.

그런데 진흥왕은 단양에 적성비(赤城碑)라는 것을 세우기도 했어요. 적성비는 왕의 업적을 알리기보다 적국이 차지하던 성을 공략한 신하의 공을 칭찬하고, 그 지역에 살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단양 신라적성비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성을 빼앗은 이사부와 여러 신라 장군, 또 이들을 도와 공을 세운 사람들을 칭찬하고 이 지역에 살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거예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기획·구성=배준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