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
메이지 유신으로 국력 키운 일본, 운요호 사건으로 문호 개방 강요… 인천·부산·원산 등 3개항 열어
구식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 후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 더 심해져
'쇄국 VS 개화' 갈등 더 커졌어요
오는 27일부터 이틀간 인천에서는 '개항장 밤마실'이라는 행사가 열려요. 야간에 인천 중구 신포로 개항장 문화지구를 개방하고, 다양한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해 개항장 일대를 볼 수 있도록 한대요. 개항이란 항구를 열어 외국 선박의 출입을 허용해 외국과 교역하는 것을 뜻하고, 개항장은 개항을 통해 외국인이 오가며 무역을 할 수 있었던 지역을 말합니다.
인천 개항장은 조선이 일본과 근대적인 통상 조약을 맺은 결과로 형성되었어요. 조선은 일본과 1876년 강화도 조약, 1882년 제물포 조약을 맺으면서 개항을 하였고, 이를 계기로 근대화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뒤에는 외세의 강압과 내부적 혼란이 벌어졌던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나타나다
1875년 9월 20일, 강화도 앞바다에 '운요호'라는 일본군 군함 한 척이 나타났어요. 운요호에서 작은 보트 몇 척이 내려지더니 초지진으로 다가왔지요. 예고도 없이 낯선 배들이 다가오자 보초를 서고 있던 조선 병사들은 영해를 지키기 위해 보트를 향해 포를 쏘았어요. 그러자 작은 보트들은 다시 운요호로 돌아갔습니다.
▲ /그림=정서용
그리고 얼마 뒤 운요호가 초지진을 향해 맹렬하게 함포 사격을 했어요. 초지진에서 보트에 포를 쏜 것을 명분 삼아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날 오후 일본군은 영종도에 병사들을 상륙시켜 조선 수군을 공격하고 무고한 주민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어요. 일본군은 마을에 불까지 지른 뒤 다시 운요호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어요.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잇달아 강화도 앞바다에 군함을 보내며 조선 정부에 개항과 근대적인 통상 조약을 요구했어요.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이후 외국과의 근대적 통상 조약을 거부하는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반면 일본은 조선과 근대적인 통상 조약을 맺어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려 했지요. 그러던 중 흥선대원군이 정치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이 들리자 군사적 압력을 가해 조선이 개항하도록 압박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일본은 1867년부터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조선보다 훨씬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어요.
일본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조선 정부는 결국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에서 일본에 개항을 허용하는 통상 조약(강화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강화도 조약은 제물포(인천)를 비롯해 부산, 원산 세 곳의 항구를 개방하고, 개항장에서 일본인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 조선의 법이 아닌 일본의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었어요.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근대적인 통상 조약을 잘 알지 못했고 일본의 강압에 눌린 조선은 조약에 서명하고 말았지요. 이후로는 일본을 견제하려는 청나라의 주선으로 미국과 영국 등 여러 유럽 열강과 근대적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어요.
◇개항과 근대화에 반발한 임오군란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개항이 되고 외국 문물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에서도 근대화의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칼과 화살, 창으로 무장한 구식 군대를 대신할 근대적 군대 별기군(別技軍)을 만든 것도 그중 하나였지요.
그런데 1882년(임오년) 6월 9일, 무위영·장어영에 소속된 구식 군대가 폭동을 일으켰어요. 구식 군대는 별기군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13개월 넘게 봉급을 받지 못해 불만이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러던 중 한 달치 봉급으로 받은 쌀에 모래와 겨가 잔뜩 섞여 있자 참았던 분노가 폭발한 것이지요.
구식 군대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명성황후와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잡아 일본과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어요. 이에 구식 군대는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별기군 교관을 맡던 일본인 등 10여 명을 살해했어요. 명성황후를 제거하겠다며 궁궐에도 침입해 명성황후가 궁녀로 변장하고 궁 밖으로 도망가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임오군란으로 혼란이 커지자 고종은 구식 군대의 존경을 받는 흥선대원군을 궁궐로 다시 불러들였어요. 권력을 다시 쥐게 된 흥선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뒷수습에 나섰지만, 외세가 개입하면서 사태는 더 커졌습니다. 궁궐 밖으로 피신한 명성황후와 민씨 일파가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 것이죠.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 군대는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갔습니다. 일본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일본인이 살해된 것을 문제 삼아 군함 4척을 보내고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새로운 조약을 강요했어요. 이에 1882년 8월 30일,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군함 위에서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었어요.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손해 배상금 50만원을 지불할 것' '일본 공사관에 일본 경비대를 머무르게 할 것' 등 불평등한 조항이 담긴 조약이었지요.
임오군란이 수습되고 명성황후와 민씨 일파가 정권을 다시 잡았지만 조선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는 상황이 되었고, 쇄국파(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갈등도 더 커졌어요. 쇄국파는 "이런 상황을 우려해 우리가 충분히 힘을 기를 때까지 쇄국을 하자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맞서 개화파는 "그렇다고 문을 닫고 있으면 우리는 더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양쪽의 의견은 나름의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의 방식을 두고 조선은 큰 갈등과 혼란을 겪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기획·구성=배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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