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신라 김춘추는 고구려·中, 고려 정몽주는 日 특사로 갔죠

bindol 2021. 11. 8. 05:06

[역사 속 특사(特使)]

특별한 임무 맡은 외교사절 '특사'
김춘추, 연개소문과 평양성서 회담
정몽주는 日에 잡힌 백성 귀국시켜
1907년 고종의 '헤이그 특사'도 유명

평창 동계올림픽 때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특사(특별한 임무를 띠고 파견한 사람) 자격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했어요. 이에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특사를 보내 오는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을 갖자는 데 뜻을 모았고, 이 특사들이 다시 미국으로 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북 정상회담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어요. 이에 따라 오는 5월엔 사상 최초의 미·북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커졌지요. 이런 성과의 바탕에는 미국·북한·중국·일본 등을 오가며 숨 가쁜 외교전을 펼친 특사단이 있었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도 중대한 성과를 거둔 특사단이 있었을까요?

◇특별한 임무를 맡은 외교사절

1905년 11월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제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했어요.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친서(직접 쓴 편지)를 외국에 보냈지만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어요.

이런 가운데 고종은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전 세계 외교관이 모이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고종은 일제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하기 위해 이 회의에 비밀 특사를 파견하기로 했지요.

 /그림=정서용

특사단에는 정부 관료 출신인 이상설과 검사였던 이준, 주러 한국 공사관 외교관 이위종 등 3명이 포함됐어요. 세 특사는 1907년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뒤 호텔 방에 태극기부터 게양하고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목표는 미국·영국·프랑스 등 회의 참석 국가들의 후원과 지지를 얻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열강들 반응은 미적지근했어요. 을사늑약 자체가 서구의 비호(편들어 보호함) 아래 일제가 강제로 맺은 조약이었거든요. 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는 특사단에 네덜란드 외무대신은 "이미 여러 나라가 을사늑약을 국제적으로 승인했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주장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이를 거부했어요.

하지만 특사단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를 만나고 한국의 입장을 담은 호소문을 발표했지요. 또 평화회의 취재를 위해 헤이그에 모인 전 세계 신문기자들 앞에 우리 입장문을 발표해 지지를 얻기도 했어요. 하지만 주최 측은 끝까지 특사단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준은 그 충격으로 7월 14일 세상을 떠났어요. 비록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처음으로 전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특사단의 활동은 의미가 매우 큰 것이었어요.

◇김춘추·정몽주도 특사로 활동해

7세기 중반 신라는 27대 선덕여왕과 28대 진덕여왕이 잇따라 다스리고 있었어요. 당시 신라는 백제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었지요. 신라의 진골(왕족) 출신 귀족 김춘추(604~661·훗날 태종무열왕)는 선덕여왕 때인 642년 백제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직접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어요. 연개소문 장군을 만나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평양성 회담'을 했지만, 고구려는 이를 거절하고 김춘추를 감옥에 가뒀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에 빠진 김춘추는 간신히 고구려 땅에서 빠져나왔지요.

이후 김춘추는 진덕여왕 때인 648년 당나라에 또 한 번 사신으로 가 당 태종에게서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어요. 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훗날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에 힘입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지요.

고려 말 충신(忠臣)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1337~1392)도 특사로 활동했어요. 1378년 정몽주는 다른 신하들이 위험하다며 가기 꺼리던 일본의 규슈 지방에 사신으로 갔어요. 우리 어부들을 괴롭히던 왜구(일본 해적)를 단속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뿐만 아니라 일본에 붙잡혀 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키기도 했어요. 1384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동안 고려가 명나라에 연체했던 조공(朝貢·중국에 정기적으로 바치던 선물)을 면제받기까지 했지요. 또 명나라에 붙잡혀 간 우리나라 사신들을 고려로 귀국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했어요.

조선시대 특사로 활약한 인물을 살펴보면 조선이 건국되자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온 한명회의 할아버지 한상질,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가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이덕형 등을 들 수 있어요. 조선 초기 외교관(통신사) 이예는 일본을 수시로 왕래하며 일본 해적에 붙잡혀 포로 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을 귀국시켰던 특사예요.


[여러 가지 특사]


중국에 알려야 할 외교적인 일이 있을 때 파견하는 '주문사(진주사)', 정치·외교적으로 부탁할 일이 있을 때 파견하는 '주청사', 중국이 조선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일이 있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 파견하는 '변무사', 중국에서 우리 왕실이나 국가에 도움을 주었을 때 보답하는 의미로 보낸 '사은사'등이 있었어요. 또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을 '통신사'라 불렀지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