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선정비에 은폐된 구한말 부패 시대
조선 팔도 두루 퍼진 민씨 선정비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초입 비림(碑林)에는 역대 광주 유수 선정비가 즐비하다. 그 가운데 민영소(閔泳韶) 영세불망비가 보인다. 충청남도 공주 공산성 입구에도 비림이 있다. 여기에는 민씨 선정비가 두 개다. 하나는 도순찰사 민치상(閔致庠), 하나는 판관 민두호(閔斗鎬) 영세불망비다. 현종 때 삼척부사 미수 허목의 ‘척주동해비’ 비각이 있는 삼척 육향산 기슭에는 관찰사 민영위 유혜불망비(遺惠不忘碑)가 있다.
이들이 누구인가. 민영소는 훗날 ‘일한합방’ 공로로 총독부에서 조선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민치상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살해 대상이 됐던 인물이다. 민두호는 백성 돈 긁는 데 이골이 나 사람들이 ‘민 쇠갈고리’라 부른 관료였다. 민영위는 ‘여주의 망나니’라 불린 사람이었다.(황현, ‘매천야록’ 1권 1894년 이전④ 1.이용직과 민형식 등의 음사, 탐학과 이응서의 선정) 그런데 민영위 비석의 ‘유혜불망’은 ‘남긴 은혜를 잊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과연 그러했겠는가.
251. 선정비에 은폐된 구한말 부패 시대
민씨로 채워진 권력 집단
1873년 겨울 고종이 친정을 선언했다. 10년 전인 1863년(양력 1874년) 아버지 대원군 힘으로 오른 권좌였고, 10년 동안 아버지 그늘 속에서 숨죽이며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새로운 권력 기반은 왕비 민씨를 등에 업은 민씨 척족이었다. 그래서 고종 정권, 특히 1880년대를 ‘민씨 척족 정권기’라 부른다.
1878년 10월 1일 이조판서 민규호가 예조판서에 임명됐다. 엿새 뒤 고종은 민규호를 우의정에 임명했다. 10월 15일 민규호가 죽었다. 그가 죽기 이틀 전 고종은 민규호 아들 민영소를 직부전시(直赴殿試)하라고 명했다. 1, 2차 과거를 면제하고 곧바로 최종 시험인 전시 응시 자격을 주라는 뜻이다.(이상 ‘고종실록’)
매천 황현은 이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규호가 죽기 전 정승 직함 하나를 원하므로 즉일 그를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 아들 민영소를 다음 날 대과에 급제시키자 대원군이 고함을 쳤다. “정승 하고 싶다면 정승시키고 급제하고 싶다면 급제시키니, 지금이 민규호 세상인가?”’(황현, ‘매천야록’ 1권 1894년 이전 ⑦ 15. 민규호의 사망) 하급 군인 반란인 ‘임오군란’(1882)과 급진 개혁을 시도한 ‘갑신정변’(1884년)을 청국(淸國)에 기대 진압하면서 척족 정권은 맷집이 강해져갔다.
허울 좋은 개혁, 내무부 시대
1884년 5월 고종은 새로운 권력 기구인 내무부(內務府)를 설치했다. 내무부는 왕실 내외 사무를 총괄하는 관청이었다. 청나라를 본뜬 개혁 사무 또한 내무부가 책임졌다.
군사에서 재정까지 내무부 권력은 무한했다. 우선 친인척이 같은 부서에서 함께 근무할 수 있었다. 중앙 관직은 물론 주요 5대 지방청인 경기감사와 수령, 개성유수와 강화유수, 광주유수와 수원유수도 내무부 당상관이 겸직할 수 있었다. 1886년에는 재정을 맡은 호조판서와 선혜청 당상 또한 내무부 당상관이 겸직할 수 있게 됐다.
1887년 이후 민응식, 민영익, 민영환과 민영준이 장기간 내무부 최고 관직인 독판(督辦) 일곱 자리를 장악했다. 1893년과 1894년 2년 동안 독판 과반수가 민씨였다.(한철호, ‘민씨척족정권기 내무부 관료 연구’ ‘아시아문화’12,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이 내무부가 주도한 개혁은 부실했다. 강병(强兵) 정책이 대표적이었다. 군사는 ‘각국 사관이 여러 방법으로 군대를 만들었다.’ 무기는 ‘미국, 일본, 러시아, 프랑스 소총이 모두 섞여서 마치 에티오피아 군대처럼 다양한 총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탄환도 다 각기 달랐다.’(프랑스어학교 교장 에밀 마르텔의 회고, 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69, p170~171) 청나라에서 도입한 무기 공장 기기창은 화약과 극소량 소총 제작과 무기 수리 위주로 운영됐다.(김정기, ’1880년대 기기국, 기기창의 설치' 한국학보 4권1호, 일지사, 1978) 임오군란 후 조선을 속국화한 청나라는 근본적인 근대화를 허용하지 않았다. 척족 정권은 재정과 군사력 장악에 치중하며 자강(自强)을 위한 개혁을 외면했다.(한철호, 앞 논문)
견제 없는 권력
1892년 매천 황현이 이렇게 기록한다. ‘세상에서는 민씨들 가운데 세 사람을 도둑으로 지목했다. 서울의 민영주, 관동의 민두호, 영남의 민형식이 바로 그들이다. 평안도 관찰사와 삼도수군통제사는 10년 넘게 민씨가 아니면 차지할 수 없었다. 저 민형식은 고금에 다시없는 탐관오리였다. 백성은 그를 ‘악귀’ 혹은 ‘미친 호랑이(狂虎·광호)’라고 부르기도 했다.’(황현,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오하기문)’, 역사비평사, 2016, p92, 93)
1890년 윤2월 9일 고종은 민두호를 ‘특별히 발탁해(特擢·특탁)’ 춘천부 유수로 임명했다. ‘특탁’은 정식 절차 없는 왕명 인사를 말한다. 유수(留守)는 군사 권한까지 가진 강력한 지방관이었다. 개성, 수원, 강화와 광주에 이어 다섯 번째 유수였다.
석 달 뒤인 5월 30일 내무부에서 “춘천유수 민두호가 병영 공사비 부족을 이유로 세금 납입이 곤란하다고 한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1887년 이후 상납한 돈과 곡식과 물건을 영원히 받지 않겠다”고 답했다.(1890년 5월 30일 ‘고종실록’)
그때 내무부 수장인 독판 중 한 명이 민영익이었다. 각 독판 휘하 협판 가운데 네 협판을 민영환, 민영소, 민영달, 민영준 4인이 맡고 있었다. 민영준은 민두호의 아들이었다.(한철호, 앞 논문) ‘민두호가 부임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강원도 백성은 먹고살기 힘들어져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가 줄지어 일어났다. 백성들은 두호를 ‘민 쇠갈고리’, 민영주를 ‘망나니’라 불렀다. 조선팔도 사람들은 “왜 난리가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장탄식했다.’(황현, ‘오하기문’, p92, 93)
1894년 동학혁명이 터졌다. 혁명군은 “뼈가 부서지더라도 민영준 축출”을 주장했다.(주한일본공사관 기록 1권 2. 전라 민요 보고 궁궐 내 소요의 건 2 (25)일·청 양국군 내한에 따른 국내외 탐정 보고 1894년 6월 12일) 좌찬성 민영준은 백성 재물로 자기 배를 살찌워 원망을 산(聚斂歸怨肥己·취렴귀원비기) 혐의로 유배형을 받았다. 전 통제사 민형식, 민응식, 전 경주부윤 민치헌도 유배형을 받았다.(1894년 6월 22일 ‘일성록’) 1년 뒤 이들은 모두 사면 받았다.(1895년 7월 3일 ‘고종실록’)
월미도 사건과 민영준의 개명
1899년 8월 인천 월미도 일대가 요시카와 사타로(吉川佐太郞)라는 일본인에게 불법 매각된 사건이 터졌다. 요시카와는 ‘일-미-러 3국 석탄 저장고와 민가 53호 외 빈 땅은 대일본인 요시카와 사타로 소유’라는 팻말을 네 군데 걸어놓고 자기 땅이라 주장했다.
수사 결과 전 비서원경 민영주가 요시카와에게 뇌물을 받고 벌인 일이었다. 민영주의 아들 민경석은 이를 수사하던 평리원 재판장 김영준에게 사건 무마를 청탁했다. 김영준은 민경석에게 “민영환과 민병석을 죽인 뒤 러시아 공사관에 총을 쏘면 일이 덮일 것”이라고 사주했다.
전모가 드러나고 김영준은 교수형을 당했다.(사법품보 乙 29: ‘평리원에서 김영준·주석면·민경식·김규필의 구형에 대해 문의 1901년 3월 18일’ 등, 국사편찬위) 민영주는 유배형을 받았다가 넉 달 뒤 특별사면받았다.(1899년 음 11월 9일 ‘승정원일기’) 평리원 재판장 김영준과 이름 발음이 같았던 민영준은 민영휘로 개명했다.(황현, ‘매천야록’3권 1901년① 8.주석면의 본관 바꿈)
망국, 그리고 토지왕 민영휘
1931년 잡지 ‘삼천리’ 1월호는 ‘조선 최대 재벌 해부’ 기사에서 민영휘 재산을 농토 5만석(600만~700만원), 가옥 100만원, 주식 100만원을 포함해 1000만원으로 추정했다. 그해 총독부 예산은 2억5000만원이었다.
1902년 대한제국 토지대장 ‘양안’에 따르면 민영휘는 충주에 논 133필지 54정보, 밭 90필지에 10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충주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가 도피했던 곳이다. 민영휘는 부재지주였다. 농사는 소작인 159명이 했다. 이 가운데 118명은 땅이 없다시피 한 영세농이었다.(남금자, ‘대한제국기 민영휘의 충주 일대 토지 소유와 경영 사례’, 한국근현대사연구 65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13)
나라가 망하던 1905년부터 민영휘를 상대로 토지 반환 소송이 봇물처럼 터졌다. 전체 소송 16건 가운데 2건은 아버지 민두호, 14건은 민영휘 본인이 가져간 땅과 돈을 돌려달라는 소송이었다. 1909년 1월에는 소송 9건이 동시에 진행되기도 했다.(1909년 1월 1일 ‘대한매일신보’) 민영휘는 재산을 정리하고 상해로 이민을 시도하기도 했고, 소송을 보도한 ‘제국신문’에 소송을 걸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1909년 2월 25일, 6월 29일 ‘대한매일신보’·이상 오미일, ‘관료에서 기업가로: 20세기 전반 민영휘 일가의 기업 투자와 자본 축적’, 역사와경계 68, 부산경남사학회, 2008, 재인용)
현재 서울 가회동 북촌한옥마을 제6경으로 꼽히는 가회동 31번지는 민영휘 아들 민대식 소유였다. 5447평이었다. 민영휘는 박영효와 함께 그 위쪽 1번지 땅 2519평을 공동 소유했다. 31번지 일대는 1930년대 주택 개발업자 정세권에 의해 현재 한옥 마을로 재개발됐다. 인사동에 있었던 민영휘 집은 1672평이었다.(서울역사박물관, ‘북촌: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 2019, p140) ‘은혜를 백골난망하여 세운’ 저 선정비들에는 이런 사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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