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국정을 좌지우지한 왕비 민씨의 편지들
진살제민(盡殺諸閔), 민씨는 다 죽인다
충청도에 살던 백락관은 골수 위정척사파 선비였다. 그가 1882년 음력 5월 4일 상소를 한다. 승정원에서 상소를 고종에게 전달하지 않았는지, 백락관은 남산에 봉화를 피우며 그 원통함을 세상에 호소했다. 상소는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으나 감히 망언(妄言)을 올리며 부월(鈇鉞)의 죽임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부월(鈇鉞)’은 군법에 의해 도끼로 처형하는 형벌이다.
상소는 개항을 반대하고 왜놈을 쳐 죽이고 왜놈과 부화뇌동하는 자들 또한 쳐 죽이자는 내용으로 점철됐다. 그런데 몇몇 문구가 문제였다. “전하의 골육대신(骨肉大臣)이 때를 틈타 일어나 전하의 총명을 가리며 내외에 선동하여.” 고종의 ‘골육대신’들이 세상을 망쳤다는 뜻이다.
상소문에는 이렇게 돼 있다. “세자 책봉 문제를 왜 왜놈 하나부사 요시타다에게 의뢰해 구차하게 처리했는가.”(1882년 5월 4일 ‘고종실록’) 세자 책봉을 청 황실로부터 허락받기 위해 일본 공사에게 청 황실에 로비를 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때 고종에게는 세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이척이었다. 1874년 왕비 민씨가 낳은 아들이다. 이미 고종에게는 1868년 귀인 이씨가 낳은 완화군이 있었다. 민씨는 이 서장자(庶長子)에게 차기 왕권까지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던 터였다. 척사파들은 귀인에게 왕비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왕비가 ‘왜놈’과 결탁했다고 믿었다.
하나부사는 세자가 태어나기 전인 1872년 9월 잠깐 방한했었다. 조선 정부가 청 정부로부터 세자 책봉 허가를 받은 1875년 하나부사는 러시아에 근무 중이었다.(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추밀원 고등관직 ‘하나부사 요시타다 이력서’) 로비 청탁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척사’와 ‘반 왕비’를 상상 속에 융합한 척사파들은 소문을 사실로 믿었다.
‘골육’을 건드리고 왕비가 목숨처럼 아끼는 세자를 건드렸으니, 상소는 큰 문제가 됐다. 백락관은 즉시 남간(南間)에 구금됐다. 남간은 기결수, 특히 사형수를 수감하는 의금부 감옥이었다. 백락관의 운명은 결정돼 있었다.
그런데 한 달 뒤인 1882년 6월 9일 ‘굶주린’ 군인 수백 명이 몰려와 남간을 파옥하고 백락관을 탈출시켰다. 열석 달 월미(月米)를 못 받은 군인들의 폭동, ‘임오군란’이다. 백락관을 탈옥시키기 전 사대문 안 민씨들 집이 이들에 의해 불탔다. 군인들이 이리 말했다. “한 사람만 골라 처치하고(區處一人·구처일인) 나머지 민씨들을 다 죽인 뒤(盡殺諸閔·진살제민) 새 세상을 만들어 (흥선대원군과) 태평을 누리리라.” 그 한 사람이 바로 내전(內殿), 민비였다.(박주대, ‘나암수록’ 3권)
250. 자기 집 일처럼 국정을 좌우한 왕비 민씨
민씨 세상과 임오군란
임오군란 원인은 학정(虐政)이다. 무기 제조창인 군기시는 갑옷 13벌 값이 없어서 조달청쯤 되는 선혜청에서 돈을 빌렸고 청나라 칙사 접대비, 왕실 혼례식 비용도 선혜청에서 분담했다. 이미 임오군란 전부터 하급 군인들의 폭동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김종원, ‘임오군란 연구’, 국사관논총 44, 1993) 선혜청 청장인 당상은 왕비 민씨 오빠인 민겸호였다. 민겸호는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었다. 이 ‘호(鎬)’ 항렬 아래가 ‘영(泳)’이다. 민영익과 민영준(민영휘)과 민영환, 민영달과 민영소 이렇게 민비 조카 항렬들이 오래도록 정권 한가운데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이 가운데 민영소에게 왕비 민씨가 보낸 편지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그 편지들을 보면 150년 전 척족 정권이 이 나라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구경할 수 있다. 몇 장만 열어본다.
“나를 무시한 상소가 통분하다”
임오군란 때 충청도 장호원으로 도주했던 민비는 두 달 뒤 기적 생환했다. 이듬해 7월 18일 여러 신하가 “중궁 은택에 변란을 잘 대처했다”며 민비에게 존호(尊號)를 올리자고 상소했다. 이틀 뒤 좌의정 김병국과 우의정 김병덕, 예조판서, 참판, 참의가 역시 존호를 고종에게 청했다. 그러자 형조참판 이용원이 “재정이 가난해 벌어진 일인데 겉치레 행사는 불가하다”고 반대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행사를 불허했고, 머쓱해진 좌·우의정은 사표를 던지며 한성 밖으로 나가버렸다.(1883년 7월 20일 ‘고종실록’)
존호를 거부당한 중전 민비가 조카 민영소에게 편지를 쓴다. ‘이용원이가 오늘 상소를 하였는데, 구어(句語)가(구절마다) 절절히 통분(痛憤)하다.’(국립고궁박물관 유물번호 ‘고궁 1196’)
자기를 비판하는 상소에 대한 분노를 조카이자 병조판서인 민영소에게 폭발시킨 것이다. 당일에 승정원을 통해 올라온 상소를 정확하게 보고받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자가 공식 장소에는 나서지 않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민비는 ‘주상과 김옥균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갑자기 침실로부터 나와 끼어들’ 정도로(김옥균, ‘갑신일록’, 갑신정변 회고록, 건국대출판부, 2006, p97)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정치가였다.
“흉도 토벌대를 보냈다”
1890년대는 극에 달한 삼정문란에 저항해 곳곳에서 민란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東學)도 그 민란을 이끄는 잠재적인 무리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터지기 전, 민비가 조카에게 편지를 쓴다.
‘흉도(凶徒)가 끝내 안 그치니 불가불 토벌하는 부대(隊討·대토)를 보낸다. 혹 동학당으로 침입하는 무리가 있으면 큰일이다. 병정 100여 명을 보낸즉 더 소란하고 소동될 일은 없을 듯하다.’(‘고궁 1150’)
그 무렵 청나라 실세인 서태후가 생일을 맞았다. 왕비가 또 조카에게 편지를 쓴다. ‘어떠하든지 우리 민가(閔家)는 청국 황제 모자(母子) 생일에 가 인사하는 것이 좋으니, 가는 것이 좋다.’(‘고궁1187’) 축하 사신은 정사에 이승순, 부사에 조병우가 선정됐는데, 부사 조병우는 상소로 자진 사퇴했다. 대신 민비 조카 민영철이 부사로 청나라로 떠났다.(1894년 1월 12일, 4월 24일 ‘고종실록’) 민비는 민영철 편으로 금은보화를 더 보냈는데, 일본 눈을 피해 몰래 운반했다.(황현, ‘매천야록’2 1894년⑥ 3.성절사 북경 파견, 국사편찬위) 결국 동학은 터졌다. 고종은 처조카뻘 민영휘를 통해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했고, 덩달아 파병된 일본군에 의해 농민군이 진압됐다.
“조병갑이는 다른 곳에 보낸다”
종교였던 동학이 민란으로 변한 원인 제공자는 고부군수 조병갑이었다. 물세와 자기 아비 선정비 비각 건립 비용을 강제하고 이를 항의하는 농민들을 죽인 자였다. 과거 급제한 흔적이 없는 이 조병갑은 고종 정권 내내 승승장구했다. 1889년 4월 조병갑은 영동 현감에서 고부군수로 옮겼다. 그 무렵 왕비가 조카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조병갑이는 그러하나, 그 색(色·관직) 외에는 나지 않아 다른 데로 하겠다.’(‘고궁 1178’)
무슨 말이냐. 당시 지방관(地方官)은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요직이었다. 그런데 임기가 만료돼 조병갑이 중앙으로 복귀한 것이다. 그때 민비가 조병갑 민원을 들어주지 못하고 일단 다른 보직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조병갑은 1892년 4월 2일 기기국 위원이 됐다가 26일 만인 4월 28일 고부군수로 복귀했다.(1892년 4월 2일, 4월 28일 ‘승정원일기’) 2년 뒤 조병갑은 고부를 혁명기지로 폭발시켰다. 조병갑이 기기국으로 발령 난 다음 날 의정부 우참찬에 김성근이 임명됐다. 다음 날 민비가 조카 민영소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김성근이는 참찬 시켰다.’(‘고궁 1204’) 참찬은 장관급이다.
“과다하게 받아 불안하지만…”
같은 민씨 집안 인사는 물론이고 이렇듯 바깥 사람들 인사에도 왕비는 적극 개입했다. 반대급부는 당연했다. 매관매직(賣官賣職)은 고종-민씨 정권 내내 존재했다. 일말의 죄의식 혹은 염치 또한 존재했다. 날짜와 연도 미상의 편지에서 민비는 조카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강계에서 온 것은 자세히 보았으나 너무 과다하니 불안하다.’(‘명성황후가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 94, 한국학중앙연구원) 지방에서 상납한 물건이 과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재정이 옹색해 넉넉하게 썼다’는 추기가 붙어 있다. 심지어 조카 민영소에게 통영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사로 하여금 현지에서 5000냥만 얻어주게 하라는 노골적인 상납 요구도 들어 있었다.(‘1894년 명성황후가 민영소에게 보낸 편지’1,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고 다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각처 진헌(進獻: 올린 물건)과 네 자상(子償:’백성의 갚을 것' 즉 백성에게서 거둔 것)은 (주상께) 다 잘 바쳤다. 문임(文任: 제학·提學) 자리는 그렇게 하겠다.’(‘고궁 1163’) 매관매직은 왕비 혼자 한 일이 아니요 고종 부부가 함께 벌인 일이었다.
붕괴된 통치 시스템과 ‘명성황후’
조선 왕조 전통적인 통치 원리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상호 견제였다. 왕도 관료 집단도 자의적인 정치는 불가능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이를 파괴한 혐의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고종 정권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1873년 고종 친정 선언 이래 왕권 견제 기능을 할 신권은 고종 척족인 여흥 민씨 세력에 독점돼 있었다. 국방에서 경제까지, 포상과 처벌 그리고 인사까지 이들 민씨 척족과 왕이 공동으로 권력을 행사했으니, 500년 전 정도전이 조선 개국과 함께 꿈꿨던 ‘재상(宰相) 정치'는 불가능했다. 견제 불가능한 공생 권력에 국방은 무너졌고 경제는 부패했고 인사는 농단됐다.
왕비 민씨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그녀가 쓴 이들 편지를 읽어보면 큰 사건마다 주어(主語)는 왕비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남편 고종이 있었다. 더 많은 편지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검색페이지에서 ‘명성황후 한글편지'를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임오군란 군인들이 구출했던 백락관은 이듬해 결국 목이 잘려 죽었다. 참수 수단이 상소에 나오는 도끼였는지 망나니 칼이었는지는 알 길 없다. 이상 많은 이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라 부르는 고종 왕비 민씨의 편지들 이야기였다. 그때 나라가 그랬다. 이래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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