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불꽃처럼 살아간 혁신유림② 노비 해방과 간도 집단망명
을사조약 이듬해인 1906년 전남 구례에 살던 선비 매천 황현이 시를 쓴다. ‘나라가 망할 때는 사대부가 먼저 망가지는 법 / 양나라 조정에 춤추는 이는 절반이 최씨요 노씨라네(亡國先亡士大夫 梁庭舞蹈半崔盧·망국선망사대부 양정무도반최로)’(황현, ‘매천집’4, ‘형남 물가에서 소를 타다·荊渚騎牛·형저기우’) 당나라가 망하고 나니 당을 무너뜨린 후량(後梁) 조정에 당나라 귀족들이 춤을 추고 있더라는 말이다. 조선도 비슷했다. 나라는 쑥대밭이 됐다. 쑥대밭을 예견했거나 만들어버린 많은 이들은 일찌감치 일본으로 배를 갈아탔다. 그 가운데 권력 주변에 살고 있던 속칭 유림(儒林)이 있었다.
4년이 지난 1910년을 사람들은 국치(國恥)의 해라 불렀다. 총 한 방 못 쏴보고 나라가 사라졌으니 치욕스럽고 우울했다. 그런데 모두가 우울하지는 않았다. 심산 김창숙은 기억한다. ‘그때 왜정(倭政)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김창숙문존, ‘벽옹73년회상기’, 성균관대출판부, 1997, p233)
‘최씨’ ‘노씨’도 있지만 지사(志士) 또한 있는 법이다. 망국을 맞아 홀연히 조선을 떠나 간도(間島)로 집단 망명한 이들이 그러했다. 이 이야기 제목은 ‘혁신유림 집단 망명기’다.
249. 불꽃처럼 살아간 혁신유림② 노비 해방과 간도 집단망명
망국, 집단 순국, 집단 망명
많은 양반이 조선 멸망과 함께 대거 자결 순국했다. 안동 혁신유림의 대부 김대락은 이만도, 이종언, 이현섭, 류도발, 이석주 5인의 자결을 기록했다. 나라 못 지킨 쓸모없던 목숨을 버리겠다는 의리(義理)를 따른 행동이었다. 혈맥, 혼맥으로 그물처럼 얽힌 안동 유림들은 망국과 집단 자결에 충격받았다. 영남 유림은 ‘황성신문’이 ‘조선 최고의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던 골수 주자성리학자들이었다.
자진(自盡) 대신 살아서 ‘또 다른’ 바른길(正道·정도)을 택한 사람들이 혁신유림이다. 을사조약 이후 협동학교를 세운 선각자 류인식, 김대락, 이상룡, 김동삼이 그들이다.(2021년 2월 10일 자 ‘박종인의 땅의 역사’ 참조) 이들은 경북경찰부가 ‘사회 이목을 놀라게 한 중요 범죄에 본도(本道) 관계자가 없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라 할 만큼 독립운동에 열심이었다.(경북경찰부, ‘고등경찰요사’(1934), 류시중 등 역, 선인, 2009, p25)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뒤 이들 상당수는 만주로 떠났다. 전국 혁신유림들이 집단으로 기획한,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망명이었다.
시대정신의 상징 ‘노비 해방’
신사상을 받아들인 혁신 유림은 놀랍게 변신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들이 택한 첫 번째 행동은 노비 해방이었다. 융희 원년(1907년) 충남 홍성에 사는 혁신 유림 김좌진은 ‘노복 30여 명을 모아 놓고 주안을 베푼 후 종 문서를 그들의 눈앞에서 불살라 버리고 그 당장에서부터 경어를 쓰기를 서슴지 아니하였다.’(1930년 2월 15일 조선일보 ‘암살당한 김좌진의 일생’) 김좌진은 ‘호명학교'를 만들어 신교육을 하다가 만주로 건너갔다.
1906년 ‘협동학교’를 만든 류인식은 이듬해 가내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고 백정 평등 운동인 형평 운동을 적극 원조했다.(동산전집 하, ‘동산문집’ 약력, 동산선생기념사업회, 1978, p146) 김대락은 예천과 봉화, 강릉에 흩어져 있는 노비 270여 명에게 땅을 나눠주고 문서를 없애버렸다.(종증손 김시중 증언) 류인식과 함께 ‘협동학교’를 만들고 김대락에게 신사상을 깨우친 이상룡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직후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석주유고 후집 ‘연보', 석주이상룡기념사업회, 1996, p524) 서울에 있는 소론 혁신 이회영 가문 또한 가노(家奴)를 해방시켰다.(‘이회영 약전’, 이정규, 이관직 저, 을유문화사, 1985, p197)
신분제는 이미 1894년 갑오개혁 때 철폐된 구악(舊惡)이었다. 그러나 노비는 물론 양반 신분은 현실에 엄존했다. 심지어 이종일, 나인협, 박준승 등 1919년 3⋅1운동 민족지도자 33인 가운데 몇몇 인물은 총독부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양반(兩班)’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런 대혼란기에 땅문서 노비문서 싹 정리하고 만주로 떠났다. 조선 제일 완고 집단의 혁명적인 변신이며 신분과 재산과 목숨을 팽개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모험이 아닌가.
신민회와 간도 신흥학교
나라 동쪽 안동에만 시대정신이 강림한 것은 아니었다. 망국 무렵 ‘대한매일신보’를 만든 양기탁이 신민회(新民會)라는 결사 조직을 만들어 새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민회에는 서울 사는 이회영 일가와 여러 안동 문중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내 활동을 포기하고 만주에 기지를 만들어 독립을 하겠다는 큰 기획을 세웠다. 그리고 떠난다. 동시다발적으로 노비를 해방하고 재산을 팔아치우고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난다. 이회영 아내 이은숙은 이상룡을 ‘경상도 혁명 대표’라고 불렀다.(이은숙, ‘서간도 시종기’, 일조각, p75) ’1911년 영남파 두목 이상룡과 김대락이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이주했다. 치열한 배일 조선인 십수 명이 연이어 그 땅으로 달아났다. 이주 열기는 점차 도내 각 군에 전파됐다. 현재 그곳 거주자는 2만5000명 내외로 판단된다.’(경북경찰부, 앞 책, p163 등)
이회영 가문은 서울 명동과 경기도 양주에 있는 땅을 팔았다. 이상룡 가문은 99칸 임청각을 문중에 팔았다. 김대락 가문은 내앞마을 삼천 석 땅을 팔았다. 내앞마을 친척이자 훗날 ‘만주 호랑이’라 불린 무골 김동삼 또한 초가삼간을 내놓고 만주로 갔다.
그 돈으로 유하현 삼원보에 땅을 사 한인 조직 경학사를 만들고 통화현 합니하에 교육기관 신흥강습소를 만들었다. 이 학교가 훗날 독립군 지휘관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다. 동토(凍土)에 논농사까지 성공시켰으니, 농사를 짓고 문(文)을 배우고 무(武)를 훈련하는 병농 공동체였다.
‘부패한 정사와 문란한 기강’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했던 김대락은 ‘서양을 배워 힘으로 독립을 되찾자’(‘신흥학교 권유문’)는 근대적 인물로 탈각했다. ‘칼도 창도 못 써보고 이 지경이 된’(김대락, ‘분통가’) 나라를 위해 힘을 기르자는 자각이었다. 1912년 만주에서 맞은 중국 신해혁명 소식에 김대락은 ‘동양삼국이 마침내 평등과 자유가 이뤄졌으니 가슴속 참다운 봄이 있다’고 적었다.(김대락, ‘백하일기’ 1912년 1월 2일)
해외에 무장 투쟁 기지를 세운다는 첩보에 국내에 남은 많은 인사들이 체포됐다. 신민회 총감독 양기탁 판결문에는 이 혁신유림들이 꿈꾼 미래가 잘 나와 있다.
‘자유의 천지라 믿는 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획하여 조선 본토로부터 상당 재력 있는 다수의 인민을 동지(同地)에 이주시키고 토지를 구입해 부락을 세우고 신영토를 만들려 했음. 또 다수의 교육 있는 청년을 모집해 보내고 민단 조직과 무관학교 설립을 통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구한국 국권을 회복하려 함.’(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 피고 양기탁 등 16명 보안법 위반 판결문’)
조선 500년 만의 집단 희생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노비 부리고 땅 굴리며 비단옷 입고 살았을 고루한 양반들이 한번도 겪지 못한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조선왕조 500년사에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이 공동체를 위해 집단적으로 일체를 던져버린 귀하고 드문 사람들이다. ‘왕공족(王公族·고종 친족)’과 ‘조선귀족(朝鮮貴族)’ 이름으로 매국노들이 마치 당나라 옛 귀족 최씨·노씨들처럼 춤추며 사는 동안 저들은 불꽃처럼 살았고 불꽃처럼 죽었다. 정신에 신분이 존재한다면 저들이 노비고 이들이 귀족이다.
해방 이후 – 김시중의 추억
해방이 되었다.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락 종증손 김시중(84)이 말한다. “면천한 노비들이 가져다 준 좁쌀도 먹고 소주 양조장에서 술 만들고 남은 수수껍질 얻어서 사카린 섞어 퍼마시고 온 가족이 아침부터 취해 자빠지기도 했다. 중학교 월말시험 볼 때는 월사금 안 낸 아이는 교실 밖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많이 울컥해서, 왜 울 할배가 만주에 가서…”
지역과 신분과 노선으로 갈등을 빚는 운동가들을 보면서 이회영은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했다. 이회영은 1932년 변절한 조카 이규서 밀고로 대련에서 체포돼 고문사했다. 김대락은 1914년 만주에서 죽었다. 무덤은 실전됐다. 찾지 못한 김대락 유해는 지난 세기 말 그 의관(衣冠)을 내앞마을 앞에 묻었다. 장례는 영남 유림장으로 치렀다.
이상룡 또한 1932년 길림에서 죽었다. 마적에게 유족들이 붙잡혀 가매장된 유해는 해방 후 운구됐다. 김동삼은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돼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었다. 유해는 한강에 뿌렸다. 김대락 누이이자 이상룡 처제이자 자결 순국한 이중업의 아내 김락은 3·1운동 때 고문받고 실명으로 고통받다 1929년 죽었다.(경북경찰부, 앞 책, p25)
1905년 1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젊은 청나라 혁명가 진천화(陳天華)가 바다에 투신자살했다. 그녀가 남긴 ‘절명서(絶命書)’ 부분이다. ‘우리가 망할 길을 걸은 것이지 어찌 남을 원망하는가. 우리가 망할 길이 없었다면 저들이 우리를 망하게 했겠는가. 조선이 망한 것은 조선 스스로 망한 것이지 일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망한 나라, 사라진 공동체 부활을 위해 저들은 불꽃처럼 살았다.<’불꽃처럼 살아간 혁신유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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