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경복궁에 숨은 역사 ③끝 효자로 플라타너스 숲의 정체
경복궁 약전(略傳)
‘1865년 3월 의정부에서 평석이 발견됐는데,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으면 자손이 끊기니 다시 지어서 보좌를 옮기면 대를 이어 국운이 연장되고 인민이 부유하고 번성하리라고 적혀 있었다. 이를 대원위 합하에게 바치자 궁을 중건하라는 명이 내려왔다.’(‘경복궁영건일기’ 서, 한성부 주부 원세철, 1868년)
그리하여 시작된 경복궁 중건 역사는 1868년 7월 4일 고종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문무백관 하례를 받으며 공식 완료됐다. 비가 내리던 그날 판부사 이유원이 고종에게 청했다. “이 법궁을 억만년토록 기명(基命·일의 시작)과 정명(定命·일의 끝)의 근본으로 삼으소서.” 고종이 말했다. “마땅히 가슴속에 새겨두겠다.” 임진왜란 이후 276년 만에 부활한 조선왕조 법궁을 수호하고 국태민안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후 궁에는 많은 일이 벌어졌다. 1895년 왕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피살됐다. 이듬해 왕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1915년 총독부는 많은 전각을 허물고 경복궁을 조선물산공진회 전시회장으로 전용했다. 11년 뒤인 1926년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에 섰다. 이듬해 광화문이 동쪽으로 이건됐다. 1929년에는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열렸다. 더 많은 전각이 사라졌다.
광복 후 총독부 청사는 대한민국 정부청사였다가 국립박물관이었다가 1995년 해체됐다. 지금은 고종 때 중건된 경복궁을 복원 작업 중이다. 고종이 깨뜨린 법궁 수호와 국태민안의 의지가 공화국시대에 실행되는 중이다.
잊힌 궁궐, 경복궁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황궁을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긴 뒤 경복궁은 버림받았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왕은 다시 경복궁을 찾지 않았다. 실록에 따르면 이후 고종이 경복궁을 찾은 날은 1906년 9월 13일 고종 54회 생일인 만수성절(萬壽聖節·음력 7월 25일) 잔칫날밖에 없었다. 그사이 1901년 7월 1일 지방에서 놀러온 민간인들이 병정들을 따라 무너진 경복궁 담장을 통해 구경하다가 걸리기도 했다.(‘사법품보·司法稟報’ 30 1901년 7월 1일)
결국 경복궁은 식민지 지배 기관인 총독부 청사 터로 변했다. 이후 도시는 대폭 바뀌었다. 1914년 12월 2일 서소문이 경매로 매각됐다. 이듬해 3월 6일 서대문도 매각됐다. 목재는 205원에 경성 사람 염덕기에게 낙찰됐고 석재는 도로 확장용 자재로 들어갔다.(1915년 3월 15일 등 ‘매일신보’)
경성 거리에 나타난 가로수
500년 동안 유지됐던 도시 구조가 변화하면서 또 다른 생명체가 역사에 등장했다. 가로수다.
1917년 총독부 ‘도로요람’은 주요 도로에 가로수를 7.27m 간격으로 심되 연 2회 손질을 하며 교통에 지장이 없도록 아랫부분은 가지를 잘라내도록 규정했다.(조선총독부, ‘도로요람’, 1917: 김해경, ‘일제강점기 경성 내 가로수에 대한 일고찰’, 서울과역사 98호, 서울역사편찬원, 2018 재인용) 도심에는 병충해에 강하고 열매 없는 낙엽수를 심도록 규정했다. 세종 때 30리마다 이정표 나무 후수(堠樹)를 세우라는 기록이 있고 정조 때 수원 융릉 가는 길에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본격적인 도심 가로수는 이때 탄생했다.(김해경, 앞 논문) 경복궁 주변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가로수를 처음 본 사람들 반응은 두 가지였다. 가로수는 ‘황금정 1정목 자동차상가 앞 나무 한 개를 뿌리째 빼가는 악희(惡戲)’의 대상이기도 했고(1917년 4월 17일 ‘매일신보’), 가로수의 잎사귀들은 ‘양양(陽陽)한 광채의 물결 위에서 파닥이면서 가벼운 파문을 일으키는’ 낭만의 대상이기도 했다.(김안서, ‘수확의 가을과 시상’, 삼천리 12권 9호 1940년 10월) 유럽 여행을 떠났던 독립운동가 박승철은 파리에서 ‘노방수(路傍樹)가 열을 지여 잇나이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파리와 베를린’, 개벽 24호, 1922년 6월)
동네마다 달랐던 가로수들
1934년 가로수 식수 6개년 계획이 결정됐다. 이에 따르면 플라타너스와 모니후에스(?·양버들나무 추정)를 연건동 대학병원 부근(플라타너스)과 안국동~돈화문(양버들)에 심고 광화문거리에는 중앙에 녹지대를 만들어 가로수를 심도록 돼 있다. 그리고 1936년 심었던 가로수들 가운데 고사(枯死)한 1400그루를 같은 종류로 갈아 심고 1300그루를 새로 심었다.(1936년 3월 5일 ‘조선중앙일보’) 경상남도에서 가로수 600만 그루 심기 대회를 열고 부산-창원-진주에서는 가로수 품평회를 열 정도로(1931년 1월 23일, 1932년 3월 8일 등 ‘부산일보’) 가로수는 ‘총독부가 선사한 근대의 상징’으로 장려됐다.
소위 녹화사업은 꾸준히 계속됐는데, 포플러와 향나무와 아카시아가 말라죽자 이를 플라타너스로 대체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김해경(건국대 녹지환경계획학과)에 따르면 이 나무들은 해방 후까지 유지돼 1957년에도 태평로 일대에 플라타너스, 광화문 광장에는 은행나무, 한강로에는 양버들, 청량리~동구릉 연도에는 수양버들이 그대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니까 각 지역마다 종류가 다른 가로수들이 군집을 이루며 자라나고 있었다는 말이다.
플라타너스, 추억 그리고 역사
기억이 추억이 되고 추억은 역사가 된다. 쓰린 추억도 추억이고 아픈 역사도 역사다. 전국 팔도에 살고 있는 노거수(老巨樹)는 그 자체가 역사다. 2009년 광화문광장이 조성되면서 총독부가 심었던 세종로 중앙분리대 은행나무들이 뽑혀나갔다. 29그루였다. 이들은 원래 경기도로 이사하려 했으나, ‘뿌리까지 뽑아놓고 보니 나무를 실은 트럭이 터널을 통과하지 못해’ 부랴부랴 도로 양편 정부청사와 시민열린마당으로 옮겨 심었다. 이미 주요 가지들은 잘라낸 탓에 나무들이 겪은 식민지와 전쟁의 역사는 찾아볼 수 없다.
경복궁 주변은 어떨까. 현 광화문 앞길에 심었던 은행나무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런데 경복궁 서쪽 효자로 주변에는 거대한 플라타너스들이 은행나무들 사이에서 자라고 있다. 성장 속도가 빠른 장점이 있지만 꽃가루가 날리는 데다 성장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라 간판을 가리는 단점으로 퇴출 대상이 된 나무들이다.
그런데 그 장단점 뚜렷한 나무들이 지금 경복궁 서쪽 길 양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서울시는 물론 관할 종로구에도 이 나무들이 언제 식재됐는지 기록이 전무하다. 이 플라타너스들은 1951년 촬영된 미군 항공사진에도 등장하니, 총독부가 심은 나무일 확률이 크다. 일제강점기 그 복잡하고 서글프고 강요된 역사를 견디며 자라나 어느덧 역사와 함께 늙어버린 나무들이라는 말이다. 왜 이들을 ‘일제의 잔재’라며 폐기 처분하지 않았는지 이유는 알 길 없으나, 그 덕에 우리는 저 키 큰 나무들이 품고 있는 역사를 호흡하며 도심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동십자각과 수수께끼의 포플러
1929년 9월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가 열렸다. ‘총독부 시정 20주년’을 기념하는 초대규모 엑스포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경복궁 전각들이 박람회를 위해 빗자루로 쓸어내듯 쓸려나갔다. 1929년 7월 경복궁의 동쪽 궐(闕·궁을 지키는 망루)인 동십자각 주변 담장이 전격 철거됐다. 동십자각 양옆을 박람회 출입구로 사용하기 위한 조치였다. 동십자각은 도로 속 섬이 됐다. 2년 전인 1927년 광화문이 경복궁 동쪽 건춘문 옆으로 이건당했다. 이건된 광화문은 박람회 메인게이트로 전락했다.
1929년 총독부 유리건판 사진을 보면 현 경복궁 주차장 앞에는 가로수가 한 그루도 없다. 1947년 미국 ‘라이프지’가 찍은 사진에도 가로수는 보이지 않는다. 2020년 겨울, 삼청로 노변에는 어린 은행나무가 줄지어 있는데 동십자각 뒤편 주차장 입구에 거대한 포플러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뜬금없는 이 나무,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왔는가. 기록도 없고 아는 이도 없다.
복원된 건물과 달리 노거수는 시간 속에서 변화한다. 역사와 함께 키가 자라고 덩치가 불어나고 꽃이 피고 잎이 떨어진다. 서울 가로수 역사는 120년이 넘지만 역사를 알려주는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김해경, 앞 논문) 현실 속에 숨쉬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상 간의대 토막 품계석 사건과 척추 부러진 천록에서 가로수까지, 경복궁에 얽힌 몇몇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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