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경복궁 석물의 비밀① 근정전 품계석과 간의대(簡儀臺)
1395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완공한 경복궁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녔다. 임진왜란 개전 직후인 1592년 4월 선조 일행이 북쪽으로 도주하자 분노한 한성 주민들이 난입해 불태웠다.(1592년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이후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건 공사를 시작할 때까지 경복궁은 공궐위(空闕衛·빈 궁궐 경비대)가 지킬 뿐 왕국 법궁(法宮) 기능은 상실했다. 몰라도 상관없으나 알면 다시 보게 되는, 그 경복궁에 얽힌 비밀 이야기다.
[236] 경복궁 석물의 비밀① 근정전 품계석과 간의대(簡儀臺)
천재 일벌레 세종의 치적들
조선 4대 국왕 세종은 천재였고 일벌레였다. 천재도 부담스러운데 일벌레이기까지 했으니 그 아래 관료들은 죽을 맛이었다. 예컨대 영의정 황희는 나이 예순넷에 부모상을 당해 3년 휴직계를 냈다가 100일 만에 복직당했다. 예순아홉에 사표를 냈으나 또 거절당했고 일흔여섯에 낸 사표도 거부됐다. 1449년 여든여섯에 또 한 차례 사표 파동을 거친 후에야 세종은 황희를 은퇴시켰는데 이듬해 세종이 죽고 2년 뒤 황희도 죽었다. 그런 관료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 일벌레 천재 군주가 완성한 시스템 또한 한둘이 아니었다. “옛 무기가 우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고 자부할 정도로 최신 무기를 개발했고(1445년 3월 30일 ‘세종실록’), 자랑스러운 훈민정음을 창안했다. 그리고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천재 과학기술자들과 함께 천문 관측 시스템을 만들어갔으니, 그 가운데 가장 거대한 기구가 간의대(簡儀臺)다. 1433년 경회루 북쪽 담 안에 설치한 천문대 간의대는 높이가 31척(9.3m)에 길이는 47척(14.1m)에 너비는 32척(9.6m·1척 30㎝ 기준)이었다.(1437년 4월 15일 ‘세종실록’) 간의대 위에는 청동을 부어 만든 간의를 설치해 천체 현상을 관측했다. 그 옆에는 청석(靑石)을 정교하게 깎아 절기를 측정하는 규표(圭表)를 두었다.
괄시받은 간의대
간의대 역사는 수난(受難)의 역사였다. 1442년 12월 26일 세종은 느닷없이 경회루 간의대 자리에 별궁을 짓겠다며 간의대를 북쪽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그러다 일주일 뒤인 1443년 1월 3일 “자손만대에 전하려던 간의대를 헐어버리려니 마음이 괴롭다”며 명을 취소했다. 하지만 세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내가 머물 궁이 필요하다”며 별궁 자리를 고르라고 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2월 4일 또 마음이 바뀐 세종이 간의대를 옮길 자리를 고르라고 명했다.
세종은 합리적 사고방식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러니 며칠 사이 변심을 거듭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별궁 자리를 고르라는 명이 떨어지고 11일이 지난 1월 14일, 사간원 좌헌납(간언을 담당하는 관리) 윤사윤이 왜 간의대를 헐고 궁을 짓느냐고 왕에게 물었다. 세종 입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대답이 튀어나왔다.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중국 사신이 보게 될까 해서다.”(1443년 1월 14일 ‘세종실록’)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국호(國號) ‘조선(朝鮮)’을 하사받은 사대의 나라였다. 그리고 천문을 관측하고 이에 따라 절기와 시각을 측정하는 일은 황제국의 권리며 제후국에는 금기(禁忌)였다. 세종은 그 사대 본국 명 사절에게 금기가 탄로날까 두려워 거대한 간의대를 이전하려고 한 것이다.
2월 15일 사헌부에서 또 이전 불가 상소가 올라왔지만 세종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간의대는 경복궁 북문인 숙정문 앞 담장 안으로 이전됐다. 1462년 세조 8년에는 이 간의대를 부수고 세자궁을 지으려는 시도가 있었고(1462년 2월 23일 ‘세조실록’), 1539년 중종 34년에는 간의대 담장을 높이는 공사가 벌어졌다. 이유는 ‘간의대 자리가 높아서 천사(天使·중국 사신)가 보면 왕이 대답하기 곤란해서’였다.(1539년 3월 27일 ‘중종실록’) 당대 세계 으뜸이었던 과학 기술이 사대(事大)에 의해 조락해버린 것이다.
호랑이 출몰한 경복궁
임진왜란이 터졌다. 선조가 도주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한성 백성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왕실 금고 내탕고를 털어갔다. 그리고 노비 문서가 보관된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웠다. 실록과 고려 사초도 남김없이 타버렸고 경복궁은 물론 창덕궁과 창경궁도 불탔다. 재물 탐하기로 소문난 왕자 임해군 집도 불탔다.
이후 경복궁은 273년 동안 폐허였다. 경복궁에는 전각이 ‘단 하나도 없었다’.(1704년 11월 12일 ‘숙종실록’) 가끔 노인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기도 하고(1706년 9월 16일 ‘숙종실록’), 뽕나무를 심어 왕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는 시범농업소 역할도 했다.(1767년 3월 10일 ‘영조실록’) 가끔 과거시험장으로도 사용됐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경복궁은 공터였다.
왕실에서는 공궐위를 설치해 빈 궁궐을 지켰지만 호랑이가 빈 궁궐에 들어오기도 하고(1751년 6월 9일, 1752년 1월 2일) 민간인도 수시로 드나들었다. 영조 때는 빈 궁궐에 아이 하나가 들어와 땔감을 줍다가 적발됐다. 아이는 금 술잔과 동으로 만든 사자상을 땔감 대신 주웠고, 이를 임금에게 바쳐 벌 대신 상을 받았다.(1764년 2월 13일 ‘영조실록’)
실학자 유득공의 궁궐 나들이
역시 영조 때인 1770년, 나비와 새가 나타나는 삼월 삼짇날 실학자 유득공이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와 함께 한성 나들이를 했다. 그리고 ‘봄날 한성 나들이(春城遊記·춘성유기)’라는 귀한 기행문을 남긴다.(유득공, ‘영재집’ 15) 삼청동에서 시작한 봄나들이는 남산을 거쳐 나흘째 경복궁으로 이어졌다. 남문 다리를 건너 근정전 옛터를 북쪽으로 도니 해시계인 일영대(日影臺)가 있었다. 경회루 옛터로 연결된 부서진 다리를 덜덜 떨며 건너가 구경했고 다시 다리를 건너 주춧돌 쌓인 공터를 지나 북으로 가니 간의대가 나왔다.
유득공이 이렇게 기록했다. ‘담장 안에 간의대가 있다. 대 위에 네모난 돌이 하나 있다. 서쪽에는 검은 돌 여섯 개가 있다. 돌은 길이가 대여섯 자쯤 되고 너비가 세 자쯤 되는데 물길을 뚫어 놓았다. 간의대는 드높고 시원스럽게 트여서 북쪽 동네의 꽃과 나무를 조망할 수 있다.’
대여섯 자쯤 되는 검은 돌은 규표(圭表)다. 처음 만들었을 때 검은 돌 위에 설치됐던 동표(銅表)는 사라지고 없었다.
간의대 위치는 경복궁 서북쪽 모서리였다. 신무문(神武門) 바로 옆이다. 세종 본인이 창안한 과학기구가 과학자 본인에 의해 궁궐 깊숙한 곳으로 쫓겨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폐기돼 사용하지 않으니 중국에서 배운 것인지 세종대왕이 창조한 건지도 모를 바요 용법도 모르니 매우 애석한’ 기계로 전락해 있었다.(1713년 윤5월 15일 ‘숙종실록’)
‘경복궁영건일기’와 사라진 간의대
1863년 조선 26대 국왕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실질적인 권력자는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진 세도정치를 끝내려던 대원군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을 통해 왕권 과시를 시도했다. 중건 공사는 국고(國庫) 소진과 인플레이션이라는 회복 불가능한 부작용을 낳고, 다른 공(功)들이 빛이 바랜 대원군은 1873년 권좌에서 쫓겨났다.
중건 공사를 주도한 영건도감 낭청 원세철은 중건 결정일인 1865년 4월 1일부터 큰 공사가 완료된 1868년 7월 4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기록했다. 이 일기에 간의대가 아주 순간적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린다.
‘근정전 상하 월대에 박석을 깔았다. 그리고 앞뜰에 박석을 깔고 두 줄로 품계석 24개를 세웠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2 1867년 10월 9일 맑음, 서울역사편찬원, 2019, p334)
품계석은 문무백관 벼슬 높낮이에 따라 정전인 근정전 앞마당에 정렬한 돌이다. 품계는 문, 무반 각각 정1품부터 정9품, 종1품부터 종9품까지 모두 36개지만 종 품계는 4품 이하 품계석을 생략해 총합은 24개다. 그 품계석을 1867년 10월 9일 박석 공사와 함께 앞뜰에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문장에 누대에 걸쳐 소박 받던 간의대가 등장한다.
‘문무품 각 12개는 헐어버린 간의대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文武品各十二塊 以簡儀臺所毁玉石爲·문무품각십이괴 이간의대소훼옥석위).’
조선 최첨단 과학기술의 말로
궁궐 북서쪽에 서 있던 거대한 간의대를 헐어서, 그 석재 가운데 귀한 옥석(玉石)을 다듬어 품계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흠경각 옛터에 있는 일영대를 철거하고 그 석재를 모두 다듬어 경회루 연못 석축에 옮겨 사용하였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1865년 7월 6일 맑음, p177) 유득공 일행이 경회루 북쪽으로 돌아서 본 그 일영대다.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 두 가지 가운데 간의대는 벼슬아치들 아침 조회 자리잡이용 돌맹이로, 한 가지는 연못 석축으로 어딘가에 박혀 있다는 말이다.
찬란한 세종대왕 과학시대가 이렇게 초라한 종말을 맞이하였다. 역병이 한창이지만 고궁 나들이는 풀려 있으니, 경복궁에 가시거들랑 얼핏얼핏 옥색 석맥(石脈)을 비치며 서 있는 품계석에서 말로만 듣던 간의대를 상상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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