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 끝날 무렵 폴란드가 전후(戰後) 질서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폴란드를 통해 스탈린의 동유럽 영토욕을 살피려 했다. 미·영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를 지지했지만, 소련은 폴란드 내 공산 괴뢰 정권을 밀었다.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아시아에서 소련의 대일(對日) 전쟁 참전을 원했던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독재자'와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서방 뜻에 동조하도록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결국 폴란드 운명에 관한 미·영·소 합의는 '민주적 지도자' '확장된 정부' '자유 보장' 등 모호한 용어로 도배됐다.
불분명한 합의는 금세 재앙으로 다가왔다. '민주적'이란 용어 해석부터 달랐다. 미·영은 당연히 다양한 정파의 자유로운 참여를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은 공산 세력이 아니면 모두 '비민주적'이라고 몰아붙였다. 미·영이 어영부영하는 사이 소련은 반소(反蘇) 성향의 폴란드 지도자 10여 명을 납치해 정치범 감옥에 가둬버렸다. 미국 대표가 '자유 보장'을 약속했던 사실을 거론하자, 스탈린은 '민주(공산) 세력을 전복하려는 파시스트(반소) 세력에 자유는 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당했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챘지만, 평화와 종전(終戰)을 외치는 국내 정치 분위기를 타고 침묵했다. 동유럽은 소련 수중에 떨어졌다.
대만의 중국 전문가 린원청 교수가 쓴 '중국 공산당의 협상 이론과 실무'라는 책이 있다. '모호한 문구로 의무 회피하기'와 '합의 내용 일방적 해석하기' 등을 공산당 협상술의 특징으로 꼽았다. 줄 것은 흐리고 받을 것은 명확하게 규정한다고 봤다. 1972년 미·중 상하이 코뮈니케에서 미국은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임을 인지한다(acknowledge)"고 표현했으나 중국은 이를 '승인한다(recognize)'고 해석했다.
6·25 정전 협상의 초대 유엔군 수석 대표였던 터너 조이 제독은 "공산 측이 검증을 회피하고 불리한 합의는 입맛대로 해석해 부인하는 등의 수법을 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화 도중 압박을 낮추지 말고, 회담 진척을 위해 일방적 양보를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지금 이 정부의 대북 협상은 현대사의 교훈과 거꾸로 간다. 김정은을 만나고 올 때마다 '비핵화 의지가 분명하다'고 전하지만 어떻게 분명한지는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비핵화 핵심인 신고·검증 방법과 시한 등이 모두 안갯속이다. 신고·검증은 고사하고 김정은이 육성(肉聲)으로 '완전한 비핵화'라는 말을 한 적도 없다. 북이 말하는 비핵화와 우리가 생각하는 비핵화가 같은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비핵화 합의는 모호한 단어 몇 개가 전부다. 그런데도 북의 선의(善意)를 믿자고 한다. 무엇을 왜 믿어야 하나.
소련 민족문제인민위원장 출신인 스탈린은 지역에 따라 이념보다 민족이 더 강한 호소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민족 갈등을 부추겨 소련 위성 국가를 차례로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도 마찬가지다. 항일(抗日) 전쟁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는 국민당 군이 입었지만, 항일 민족 군대라는 이미지는 공산
당 군이 차지했다. 국공 내전에서 민심은 공산당 쪽으로 기울었다.
최근 북은 하루가 멀다고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고 있다.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를 무시하고 남북 경협에 속도를 내자는 것이다. '모호한 핵 합의'에 '감상적 경협'이 더해지면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핵 가진 북한 집단을 대규모 경제 지원한다면 그게 '핵 인질' 노릇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