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까마귀 싸우는 골에
중앙일보
입력 2021.08.19 00:18
유자효 시인
까마귀 싸우는 골에
무명씨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우나니
청강(淸江)에 조히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 가곡원류
왜 흙탕물을 뒤집어 쓰려 할까?
해오라기더러 까마귀가 싸우는 골에 가지 말아라 한다. 성낸 까마귀가 사나운 빛을 드러내면 깨끗한 강물에 고이 씻은 몸이 더럽혀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경북 영천에 가면 이 시조가 포은 정몽주의 어머니 영천 이씨가 지은 것이라 해서 포은의 ‘단심가’, 노계 박인로의 ‘조홍시가’와 함께 영천을 대표하는 시가로 꼽고 있다. 포은이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려 하자 팔순 노모가 간밤에 불길한 꿈을 꾸었다며 이 시조를 불러 아들을 만류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대통령 선거 후보경선이 본격화되자 여권은 여권대로, 야권은 야권대로 상호 비방과 인신공격이 가열되고 있다. 어제까지 백로 같던 사람이 대선전에 뛰어드는 순간 흙탕물을 끼얹어 더럽히려 한다. 온갖 과거사가 모두 소환된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들춰내 대중에 노출한다. 권력의 비정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선거판이다. 나중에는 누가 까마귀이고, 누가 백로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지나고서야 알고 안타까워하는 경우도 많다. 여론조작이나 선거 부정 같은 것이 대표적인 까마귀의 행태라고 하겠다. 그래서 선거가 과연 민주주의의 꽃인가라는 말도 나온다.
왜 굳이 그 자리에 오르려 하는지 백로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아니면 까마귀들에게 물어볼까?
유자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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