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광기의 결합, 검수완박
입력 2022.04.22 00:36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다음 중 화재를 당한 사람들의 본능적 반응이 아닌 것은? ①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회귀 본능 ②빛을 보고 몰려가는 지광(指光) 본능 ③위험해 보이는 곳에서 일단 물러나는 퇴피(退避) 본능 ④먼저 뛰어가는 사람을 따라가는 추종 본능 ⑤왼쪽으로 돌아가는 좌회(左回) 본능.
9급 소방관 시험에 나오는 문제다. 정답은? 없다. 모두 맞다(⑤는 대부분 사람이 오른손잡이기 때문이다. 트랙 경기가 다 왼쪽으로 도는 이유다). 공포가 움직이면 이성은 멈춘다. 본능을 관장하는 대뇌변연계의 활동이 논리를 관장하는 전두엽을 압도한다. 합리적 추론 대신 본능적 반사에 몸을 맡기게 된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박 원내대표는 ″검찰의 수사. 기소권 분리를 통한 검찰 정상화를 4월 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며 박병석 국회의장에게 ″22일 국회 본회의를 소집해달라″고 요청했다. 김경록 기자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밀어붙이는 민주당의 모습이 딱 이 꼴이다. 전형적인 공포 반응이다. 명분이야 검찰 권력 견제지만, 누가 봐도 불안감과 초조감의 발로다. 법사위 안건조정위원회의 들러리를 거부한 양향자(무소속) 의원이 이렇게 말했다. "강경파 모 의원이 검수완박 안 되면 죽는다고 했다. 청와대 사람 20명이 감옥에 간다는 얘기도 들었다." 김용민 의원은 검사의 항의 문자에 "곧 저에 대한 보복수사를 준비하겠군요"라고 반응했다. "선거에서 지면 없는 죄도 만들어서 감옥에 갈 것 같다"는 이재명 후보의 말은 블랙 유머만은 아니었다.
지난 5년 민주당 정권을 지배해온 심리 기제는 '포위된 요새론'이었다. 행정·입법부를 장악했으면서도 보수 세력에 포위돼 있다는 위기감을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요새 방어를 위해 결 다른 목소리는 제한돼야 한다는 논리로 진영을 결집했다. 2020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문재인 정부의 이런 '피(被)포위 의식'을 내로남불의 심리적 배경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검찰주의자 대통령의 탄생으로 위기감은 실존적 불안이 됐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등판은 초조감을 극대화했다. 둘러싼 적들이 이제 성문을 열고 밀려들기 시작했다는 절박감이다. 공포는 종종 광기를 낳는다. 1792년 9월, 대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있던 파리 시민들은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에 수감 중이던 왕당파와 반혁명 혐의 죄수 1300명을 끌어내 재판도 없이 학살했다. 거대한 역사 진보의 발걸음에 스민 피비린내 흑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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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건조정위 통과를 위해 민형배 의원을 탈당시킨 대목은 광기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안건조정위는 쟁점 법안을 놓고 다수당과 소수당이 숙의하라고 만든 제도다. 여기를 거치면 소위를 통과한 것으로 간주해 상임위 전체회의에 부친다. 민주당은 상상하기 힘든 꼼수로 의회 민주주의 장치를 민주주의 파괴 장치로 변질시켰다. 광기에는 비루함마저 섞였다. 의회 내 압도적 다수당이 목적을 위해 수단을 비틀고선 "형식과 절차는 지키지 않았느냐"고 강변한다. 의회주의자를 자처했던 김대중, 정정당당을 외쳤던 노무현의 정당이라곤 생각하기 힘들다.
화마를 만난 사람들의 다섯 가지 본능 중 지금 민주당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추종 본능이다. 몇몇 초선 강경파 의원의 "불이야!" 외침에 당 전체가 우르르 몰려다닌다. 기득권 586이 주축인 지도부는 표결도 없이 박수로 172명 전원을 발의자 명단에 올리며 독전(督戰)의 북을 울려댄다. 소수 합리파가 목소리를 내지만 어지러운 발소리에 묻히는 모양새다. 공포와 광기의 결합이다. 한국 민주화 역사의 페이지들을 당당하게 써 왔던 정당이 이렇게 망가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멈춰 서야 한다. 민주당의 입법 독주가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번처럼 우호 세력조차 완전히 등을 돌린 적은 보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국회의 시간'이라는 모호한 말로 슬쩍 숨었다. 예상대로다. 윤석열 당선인은 달랐으면 한다. 민주당의 공포 반응은 과하지만, 검찰의 정치적 수사에 대한 일반의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검찰 개혁에 대해 좀 더 전향적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 그래도 이뤄져야 할 정의가 있다면 어떻게든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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