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와 이리떼
입력 2022.05.02 00:27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권력지형이 바뀔 때마다 파워엘리트를 조명하는 언론 기사가 차고 넘친다. 보도를 보며 프랑스어인 ‘엘리트(elite)’가 사실은 우리말 ‘이리떼’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희화화된 농담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통렬한 은유법이다. 발음 나는 대로 읽어 보니 그런가도 싶다. 본디 출처도 근거도 없는 비아냥은 객관성은 부재하고 대중의 호응은 수반된다.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엘리트’의 ‘이리떼’ 표현은 단순 언어유희를 넘어 대중과 위정자 간, 신뢰의 균열이다. 우리 사회 공동체에 매우 위험한 증좌다.
애초 ‘엘리트’는 17세기경 ‘고급 상품’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후 우월적 사회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치환되었다. 돌이켜보면 역사 속 일부 엘리트들은 지나친 특권의식과 도탄의 카르텔로 대중을 그 얼마나 침탈했던가. 그러다 보니 늘 급진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의 비판 대상이 되어왔고, 그 적대감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잉태했다. 하긴 의사집단도 자유로울 순 없겠다. 의료 서비스로서의 의술이 국민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한 일부의 그릇된 행태가 존재하니 말이다.
엘리트 이중성에 대한 불신 커
간교한 이익 탐닉하기 보다
불이익 회피 않는 강건함 필요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역사 발전에서 ‘엘리트’의 역할과 기여를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반듯한 소명의식과 실천적 의지를 구현한 이들도 부지기수다. 옥석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어느 정치인은 “거창하면 지치고, 지치면 변절한다”라며 ‘엘리트’의 한계와 속성을 고백한 바 있다. 그의 말이 수긍이 가는 것은 한국 사회 내에서 인권과 약자 보호를 늘 선언적으로 외치지만, 정작 공리주의적 엘리트주의의 굴절된 프레임에 갇혀 있는 이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이성이 제어하지 못하는 현상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에서의 엘리트 주도의 진영 갈등은 대개 독자적 사유를 거치지 않는 조건반사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 사례를 열거하자면 지면이 부족하겠다.
진영 논리에 따라 선택적 정의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지식인의 민낯은 또 어떠한가. 자신이 주장해 오던 철학과 사상은 이해관계에 따라 갈지자 행보로 일관성은 유실되었다. 관료제의 병폐에 빠져 시민 의사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하는 공무원이나 타인의 ‘내로남불’은 신랄하게 힐책하면서, 정작 자신은 나르시시즘과 비판 대상의 호불호에 매몰되어 합리적 의견에 도통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보통 이럴 때면 ‘엘리트’는 ‘이리떼’로 비판받는다. 자업자득이기에 대중의 힐책에 서운할 이유도 없다.
선거가 집중된 근간에 국가의 곳간은 걱정하면서 표심을 얻기 위한 이익의 당사자가 되면 갑작스레 태세가 전환되는 각 정당은 어떤가. 시민이 기다리는 엘리트는 불의는 참고 불이익은 못 참는 이들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이 볼썽사나운 행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산이다. 이러한 낯 뜨거운 이중성으로 인해 세대 간 소통은 불통이 되고, 사회적 의사결정에 부침은 거듭되고 있다. 원래 극렬한 주장일수록 대의명분은 휘황찬란하다. 화려한 미사여구가 유발하는 대중의 환상과 기대는 그 허상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럴 때 ‘엘리트’는 ‘이리떼’의 형상으로 대중에게 슬며시 다가선다. 간교한 이익의 탐닉보다 사회 공동체의 희망을 위해 불이익을 회피하지 않는 강건한 사람, ‘엘리트’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본디 시끄럽다. 균열과 혼란 속에서 합의에 도달하는 조율의 과정이다. 권력이 시민에게 있는 민주주의는 내 편끼리 의기투합해서 갈 수 있는 간단한 체제가 아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실체는 ‘이리떼’이지만 ‘엘리트’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들만의 짬짜미를 경계해야 한다. 조율의 미명 하에 시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으로 서로의 편익을 봐주는 도탄의 카르텔을 이른바 ‘검수완박’ 합의과정을 통해 우린 여실히 목도했다.
대한민국은 경제 강국이 되었다. 성장을 위해 희생했지만 억눌려온 목소리라면 그 요구도 절실하기에 혼돈의 크기도 크다. 그러나 사회체제 안에서 이를 녹여야 한다. 법체계 밖의 선동이 판을 친다면 그건 야만의 사회이다. 사악한 이득을 취하기 위한 선동의 ‘이리떼’는 아직 도처에 있다. 그들을 선한 ‘엘리트’와 분간하는 일, 시민의 책무이다. 『두 도시 이야기』의 찰스 디킨스의 지혜를 빌리자면 “믿음의 세기이자 불신의 세기”였다. ‘이리떼’, 그들의 과장된 비교로만 시대를 받아들이는 우를 더 이상 범하지 말자. 우린 지난 시간 충분히 ‘엘리트’를 믿어왔고 ‘이리떼’의 탐욕에 절망했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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