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이념에 빠져 과학 거부하면서 독재자 숭배하는 좌편향 오류

bindol 2022. 5. 23. 05:04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2회>

<1966년 9월 14일 중국의 홍위병들이 마르크스의 초상화를 들고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들고 흔들며 가두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공공부문>

탈원전 추진한 지난 정권, 원자력 전문가의 경고는 무시

지난 1월 탈원전 정책의 결과 경상북도에서만 피해액이 28조가 발생했다는 연구조사가 발표됐다. 지난 정권이 탈원전 정책을 강행할 때, 원자력 공학과 교수들을 위시한 대다수 전문가 집단은 강력하게 저항하며 비판을 이어갔지만, 대통령과 청와대는 막무가내였다. 최상급 정보와 전문 지식이 모이는 세계 10대의 부국 대한민국 정부가 어떻게 그렇게도 무모한 엉터리 정책을 강행해서 범국민적 피해를 초래하는가? 탈원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고 집권 후 다짜고짜 밀어붙인 대통령 한 명의 고집 때문일까? 그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참모진의 문제일까? 대통령을 현혹하는 일부 편향된 전문가 집단의 영향력 때문일까? 아니면, 그 모두가 합쳐진 총체적인 정부의 실패인가?

한국과 달리 중국은 한반도에 인접한 연안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중국의 연안 지역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불의의 사고가 발생한다면, 한반도 역시 무사할 수 없음은 불문가지다. 핵무장에 성공한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흘돌이 미사일을 쏴대고, 중국은 전력난의 해소를 위해 원자로 건설을 점차 늘려가는데, 한국만 “탈원전”을 선언한들 애당초 원전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체계적으로 발전해 온 한국의 원전 기술은 2016년 가히 세계 최첨단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객관적으로 한국의 원전은 중국의 원전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건설되고 유지되고 있었음은 세계가 인정하는 바였다.

<현재 가동하고 있거나 2030년까지 건설될 중국의 원자력 발전소의 현황. 붉은색은 가동 중, 푸른색은 건설 중, 노란색은 건설 계획된 원자력 발전소를 가리킨다. (S. Yu, et al., “The role of nuclear in China’s energy future: Insights from integrated assessment,” Energy Policy 139 [2020]>.

그럼에도 북한과 중국에는 한마디 항의도 없이 자발적으로 무장 해제하듯 최첨단의 원전 기술을 스스로 무너뜨린 지난 정권은 앞으로 두고두고 비판과 단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사필귀정 관련자를 문책하고 최종 결정자를 가려내서 처벌해야 한다. 법적 단죄를 넘어 지난 정권이 탈원전을 추진했던 이념적·정치적·정책적·외교적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학계의 여러 방면에서 수백 편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올 듯하다. 특히 전문가의 경고를 무시한 채 파괴적 탈원전을 추진했던 지난 정권 수뇌부의 정치적 동기와 심리상태에 대해서 정교한 분석이 요구된다. 그들은 대체 무슨 근거로, 어떤 목적으로, 무슨 배포로 탈원전의 막장 정치를 이어갔는가?

이념과 독재 앞에선 무릎 꿇고, 스스로 진리를 독점했다고 믿는 정신분열증

지난 정권의 수뇌부가 전문가의 경고를 싹 무시한 채 탈원전을 추진했던 심리적 배경을 보면, 그들이 일찍이 1980년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에 매료되어 있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는 그야말로 마르크스와 김일성으로 도배돼 있었다. 치기 어린 학생들은 대학 입학 후 3개월 만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반년쯤 되면 볼셰비키 혁명 모델을 따라 계급해방의 제헌의회에 가입할지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의 투쟁전략에 따라 민족해방의 통일전선에 가담할지 실존적 결정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산주의에 매료된 젊은이들은 특유의 정신 분열증을 보인다. 그들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서 스스로 절대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 노예근성과 소(小)엘리트주의가 혼재된 기묘한 심리상태를 보인다. 실상 종교적 광신주의와 다르지 않은데, 공산주의 이론은 묘하게도 젊은이의 뇌리에서 지적 우월감을 부추기는 이념적 환각제로 작용한다. 레닌은 이러한 현상을 “좌익 소아병(leftist infantilism)”이라 불렀고, 마오쩌둥은 “좌의 착오”라 불렀다. 공산주의는 어떻게 젊은이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노예근성과 우월의식을 동시에 부추길 수 있었을까? 답은 공산주의 이론 속에 들어 있다.

<1952년도 중국의 포스터. “열심히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공부해서 부강하게 번영하는 신중국을 건설하자!” 그림/chineseposters.net>

마르크스주의, 과학인가 종교인가...개인숭배 전체주의 광기 낳은 근본원인

마르크스(1818-1883)와 엥겔스(1820-1895)는 역사의 합법칙성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듯, 자신들이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으며,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이론적으로 정립하여 인류가 나아갈 길을 밝혔다고 믿었다. 그들의 사회발전론은 ‘유물변증법’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정립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탁월한 지력과 인류애를 발휘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창시했다고 칭송하지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물변증법의 제1 명제가 자연과학적 진리인가? ‘사회적 존재(계급)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는 역사적 유물론의 제1 명제가 과연 사회과학적 진리인가? 엄격히 말하면 이 두 명제는 과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직관적 가설이거나 정치적 주장에 불과하다. 경험적으로 인간의 의식이 환경에 지배받는 경향이 크지만, 인간의 생각이 환경을 변화시키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20세기 초반의 양자역학은 이미 의식의 개입이 없이는 물적 현상 자체가 관찰될 수 없음을 일깨워 준다. 또한 세계사를 보면, 인간의 가치, 신념, 관념 등 주관적 요인이 물질적 조건을 극적으로 바꾼 사례가 부지기수다.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러시아와 인구의 90%가 농민이었던 중국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이야말로 마르크스의 독단론을 뒤엎는 반증 사례라 할 수 있다.

인간사회에서 발견되는 특정 경향성을 역사적 법칙으로 뒤바꾸고, 나아가 절대 진리로 격상시키는 마르크시즘의 조악한 인식론은 그 자체가 논리적 비약이며 경험적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오만하고 독단적인 마르크스의 진리관이 결국 공산 전체주의의 광기를 낳은 근본 원인이었다.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역시 문제투성이의 책이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상품의 본래 가치를 생산에 투입된 노동의 총시간으로 환원하지만, 현실적으로 특정 상품의 가치는 생산에 투입된 노동 시간이 아니라 생산자의 창의성과 상품 자체의 사회적 수요에 의해 결정된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마르크스의 <<자본론>> 사진/ https://www.redpepper.org.uk/marxs-capital-at-150-an-invitation-to-history/>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가 창출한 막대한 부가 애플사 피고용인의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됐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천재적인 기술력, 창의력, 디자인 감각과 경영기법 등 모든 면에서 애플사의 성공에 있어 잡스의 기여는 가히 절대적이었는데, 그의 기여는 상식적으로 투입된 노동 시간으로 환산될 수 없다. 현재 전 세계의 대부분 기업은 노동 시간이 아니라 이윤 창출에의 기여도를 엄격하게 평가해서 개인별로 연봉을 결정한다.

요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을 뿐, 실상은 사회변혁을 갈구하는 혁명가의 종교적 신념과 다르지 않다. 현실 사회주의가 예외 없이 공산당 무오류설, 영도자에 대한 개인숭배 등으로 점철된 전체주의로 귀결됐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열역학 법칙을 정식화했지만, 그 누구도 뉴턴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 혁명의 신전에서 불멸의 우상으로 군림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뉴턴의 물리학은 과학이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변증법은 유사(類似) 과학이기 때문이다.

문혁 말기 ‘상대성 이론’ 비판하는 열광적 정치운동 ”아인슈타인은 반동”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의 학계에서는 아인슈타인(1879-1955)의 상대성 이론을 비판하는 열광적인 정치 운동이 일어났다. 문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4년에서 1975년 사이 그 강도가 더욱 심해졌다. 물리학 및 철학 연구자들이 선두에 섰다. 주로 <<자연과학쟁명(自然科學百家爭鳴)>>이라는 과학지에 그들의 비판이 실렸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극복하고 유물론적 관점에서 새로운 과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았다.

예컨대 그들은 “빛의 속도는 불변하며, 절대로 광속을 초월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가설은 유물변증법의 기본 전제에 반하는 “완고한 형이상학적 관념”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유물변증법에 따르면 “우주와 시공은 무제한적이므로 인간이 광속을 넘어설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반드시 진실일 수는 없다”는 묘한 주장을 펼쳤다. 결국 그들의 주장은 “유물변증법은 절대 진리”라는 대전제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유물변증법에 위배된다”는 소전제에서 “고로 상대성이론은 오류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그럴싸한 삼단논법의 구조를 취했지만, 결국 증명되지 않은 대전제에서 원하는 결론을 취하는 정치적 순환논리일 뿐이었다. 그 당시 중국의 학계에 이토록 무리한 비과학적 논쟁에 벌였던 의도는 결국 과학을 정치에 종속시키기 위함이었다.

문혁 시절 중국 전역에는 어디를 가나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관습, 낡은 습관” 등 네 가지 낡은 것을 깨부수라는 “파사구(罷四舊)”의 구호가 흔히 보였다. 문혁의 광풍 속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낡은 사상”으로 몰리고 있었다. 과학의 진리성을 가리는 최고의 판단 기준이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변증법이라는 정치적 주장에 불과했지만, 문혁의 광기 속에서 과학은 이미 독자적 존립 근거를 상실했다. 문혁 시절 과학적 지식의 타당성은 혁명적 당파성에서 도출되어야만 했다.

‘슬픈 중국’ 30회와 31회에서 이미 소개됐던 철학자 옌자치(嚴家其, 1942- )는 정치 논리로 과학의 진리성을 판단하는 당시 과학자들의 불합리를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1975년 상반기 그는 “실천, 가설, 과학적 방법: 상대성 이론 논쟁에 관해서”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서 <<자연과학쟁명>>에 기고했다. 옌자치는 자서전에서 당시 그가 썼던 논문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중세 스콜라주의 방법과는 대조적으로 과학적 방법은 지식을 확립할 때 결정적으로 관찰, 실험, 실천의 중요성과 기능을 강조한다. 과학적 방법으로 자연 현상을 설명할 때는, 강단 철학처럼 고대(古代)의 저작물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의 삶과 자연 세계에 기초한다. 과학적 방법으로 자연의 법칙을 발견할 때는 실천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인정되지 않는다. 특정 과학이론의 진리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오로지 실천 밖에는 없다. 과학적 방법에 따르면, 자연과학의 이론은 그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날 때에만 번복될 수 있다.”

학부에서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고 철학의 길에 들어섰던 옌자치는 과학적 방법이 무엇인지 또렷이 알고 있었다. 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기에 그는 유물변증법이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 정치 이론이란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과학적 진리의 기준은 오로지 경험적 관찰, 실험 및 실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969년 11월 상하이 중국과학원 “자연과학 이론 중 자산계급 반동 관점을 비판하는 마오쩌둥 사상 학습반”에서 펴낸 “상대성 이론 비판.” 사진/공공부문>

물론 옌자치의 논문은 문혁의 광기 속에서는 출판될 수 없었다. 과학적 방법은 경험적 탐구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그의 언명은 곧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변증법이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는 민감한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유물변증법이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면, 마르크스주의의 진리성이 통째로 부정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이 아니라면, 그 반석 위에 놓인 마오쩌둥 사상도 역시 과학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 과학이 아니라면, 두 이론을 양대 축으로 삼는 중국공산당의 이념적 정당성이 위협받게 된다.

문혁 시기 옌자치는 비록 논문조차 출판할 기회를 박탈당했지만, 그의 과학적 입장은 2년 후인 1978년 5월 중공중앙 조식부 부장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덩샤오핑의 지원 아래 전개한 “진리 표준 대토론”을 통해서 국정의 제1 의제로 부상됐다. 개혁개방은 이처럼 과학과 정치를 구분하고, 과학 탐구의 독자 영역을 확보하는 인식론적 전환을 요구했다.

<문혁 시절의 걸개그림을 꺼내 드는 한 중년 부부. 2016년 중국의 한 도시. https://www.thequint.com/news/world/china-calls-maos-cultural-revolution-a-huge-disaster#read-more>

얼마 전 한 좌파 경제학자가 내게 “팩트(fact)라고 있는 그대로 다 말하는 학자는 정치적 백치”라고 말했다. 그 뜻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결국 팩트라도 있는 그대로 다 말하지 말고 정치적 효력을 따져서 시의적절하게 발설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결국 역사적 사실의 기술도 특정 계급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1980년대 운동권의 낡은 사유 방식이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에서는 “모든 주장은 당파성을 갖는다,” “역사적 사실은 계급성을 갖는다,” “”가치중립성은 부르주아지의 가치다,” 등등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주장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한 주장의 연원을 추적해보면, 1960년대 이른바 “자유화 혁명(liberal revolution) 때 구미 대학가를 휩쓸었던 좌파 혁명이론이 일본을 거쳐 한국의 지식계에 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 구소련이 붕괴를 초 읽고 있던 때, 한국 지식계에는 때아닌 마르크스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의 열풍이 몰아쳤다. 탈원전 정책을 강행했던 지난 정권의 수뇌부는 아마도 그때 좌익소아병을 심하게 앓았었나 보다. 그 이후 그들은 한 살도 더 안 먹고 살아온 듯하다. 권력자가 이념에 눈이 멀어 과학을 부정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계속>

<1989년 6월, 톈안먼 광장에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옌자치(嚴家其)의 모습. 배경에는 당시 학생들이 조각한 석상 아래 “민주의 신”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보인다. 사진/공공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