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의 광기는 개인 숭배가 원인”...기록하는 자가 역사의 승자
송재윤의 슬픈 중국: 대륙의 자유인들 <30회>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주체는 절대다수의 동시대인들
사람들은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말하지만, 오직 기록하는 자만이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있다. 권력자가 제아무리 문서를 조작하고 진실을 은폐해도 역사의 평가를 제멋대로 바꾸기란 쉽지 않다. 기록의 주체는 통치자가 아니라 절대다수의 동시대인들이기 때문이다.
먼 훗날에야 비로소 역사의 진실이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은 근거가 희박한 막연한 믿음일 뿐이다. 어느 시대에 관해서든 역사 탐구의 출발점은 그 시대를 직접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훗날의 역사적 평가는 오늘날 우리가 남긴 기록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 이 시대의 세상에 대해선 바로 우리가 산 증인이다,
역사 기록은 단순한 사실 나열을 넘어 중대사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창의적 해석을 요구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였나를 파악하는데 머물지 말고, 나아가 “왜” 하필 그렇게 했나를 궁구하고 설명해야만 한다. 잠시 지난 10여 년 동안 긴박했던 한국 정치의 상황을 돌아보자. 솟구치는 의문을 누를 길 없다.
지난 정권은 왜 탈원전을 추진하고 검수완박 꼼수를 쓴 걸까?
급작스러운 탄핵 정국에서 “촛불 군중”의 지지로 집권한 지난 정권은 왜 그토록 무리한 정책을 무도한 방법으로 강행해야만 했을까? 그들은 왜 전문가의 경고를 다 무시한 채 탈원전을 추진하고, 무엇 때문에 인근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4대강의 보를 허물려 하고, 무엇을 바라고 갖은 꼼수와 악수를 다 써가며 70여 년의 형사사법제도를 급박하게 파괴하려 할까?
정권이 바뀌면 지난 정권의 실정과 착오를 바로 잡는 정치 공방과 법정 투쟁이 개시된다. 아울러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기록 투쟁이 일어난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선 당대(當代)의 지성들이 가까운 과거의 가장 민감한 정치·사회적 현안을 파헤치는 정밀한 당대사(當代史)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사건의 나열에 그치지 말고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정교한 분석이라면 더 좋다. 우리 시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훗날의 역사적 평가로 이어지는 결정적 증언이기 때문이다.
문혁의 참상을 체험담으로 고백한 ‘상흔문학’이 유일한 출구
1978년 이후 덩샤오핑과 후야오봉(胡耀邦, 1915-1989)의 지도력 아래서 “과거의 혼란을 정돈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이른바 “발란반정(撥亂反正)”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정국의 변화는 문혁의 희생자들에게 직접 겪었던 폭력과 부조리를 증언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수많은 중국 인민은 고난의 체험자로서 그동안 몰래 숨어서 깨알같이 일기장에 적어온 당대사의 어두운 기록을 문예지와 언론매체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1978년 8월 <<문회보(文匯報)>>에 발표된 루신화(盧新華, 1954- )의 단편소설 <상흔(傷痕)>이 포문을 열었다.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힌 어머니가 9년 만에 병상에서 죽음을 앞두고 오지에 하방(下放)되어 있던 딸과 극적으로 재회하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이 전국 “우수단편소설상”을 받으면서 이른바 “상흔문학”이라는 새로운 문예 장르가 생겨났다. 문혁의 참상을 온전히 자유롭게 고발할 수 없었던 시기, “상흔 문학”은 많은 이들에게 가슴에 억눌러 온 체험담을 표현하는 예술적 출로(出路)였다.
이어지는 1979년에서 1981년 사이 정부 규제가 완화되면서 장시간 억눌려왔던 문인들에게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그때까지 30년 넘게 문인들은 그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라 인민의 계급의식을 강화하고 혁명정신을 고취하는 선동대원일 뿐이었다. 1979년 이후 “상흔 문학”을 이끌었던 작가들은 인간의 현실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의 예술가였다. 그들 중 다수는 1949년 이후 태어나서 문혁 시기 성인이 된 30대, 40대의 작가들이었다.
이들은 다양한 형식의 소설과 시를 써서 사회·경제적 부조리, 관료제의 부패와 모순, 문혁 시절의 집단 폭력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고발했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한 세대 이상 전 중국인의 의식을 지배했던 마오쩌둥 사상에 관한 근본적 회의와 비판이 깔려 있었다. 상흔 문학이 각광을 받으면서 대중들 사이에선 문혁 시절의 정치범죄와 인권유린을 고발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력한 정치적 요구가 생겨났다.
중공중앙 “문혁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책임은 마오에 있다”
급기야 1981년 6월 27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이하 ‘중공중앙’)가 직접 나서서 “문화대혁명은 건국 이래 당과 국가와 인민이 겪은 가장 심각한 후퇴이자 손실”이며, 그 최종적 책임은 마오쩌둥에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마오쩌둥 사망 후 4년 10개월 만이었다. 중공중앙은 그러나 그해 겨울부터 다시 검열과 삭제의 칼날을 빼들고 “상흔 문학”의 작가들을 탄압했다. 실제로 상흔 문학의 작품들을 읽어보면, 작품을 검열할 수밖에 없었던 중공중앙의 당혹감이 감지된다.
가령 살아서 2100여 수의 시를 쓰고 요절한 “몽롱시(朦朧詩)”의 대표적 시인 구청(顧城, 1956-1993)의 짧은 시 “일대인(一代人)”을 음미해보자.
“검은 밤은 내게 한 쌍의 검은 눈을 주었다네,
난 그러나 그것으로 밝은 빛을 찾아다니네.
(黑夜給了我一雙黑色的眼睛, 我却用它來尋找光明)”
이 짧은 한 편의 시에는 진정 문혁 10년의 대동란 속에서 할퀴고 찢긴 한 세대의 상처가 통째로 핏빛 선연히 담겨 있는 듯하다.
옌자치, 가오가오 부부의 ‘문화대혁명 10년사’...인격 숭배 비판
1981년 중공중앙이 마오쩌둥에 문혁의 책임을 물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파악된다. 우선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공중앙 영도자들의 다수가 문혁 시절 수정주의 주자파로 몰려서 극심한 정치적 박해에 시달렸다던 문혁의 피해자들이었다. 또한 개혁론자들에게 문혁 비판은 과거의 케케묵은 마녀사냥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이념적 방패와도 같았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 사망 이후 문혁의 참상을 고발하는 지식인들의 역사 투쟁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1986년 9월 1일 톈진 인민출판사에서 출판된 <<“문화대혁명” 10년사>>을 뽑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옌자치(嚴家其, 1942- )와 그의 부인 가오가오(高皐)였다. 문화혁명의 전 과정을 통시적으로 서술하고 그 발생 원인을 구명한 이 기념비적 역사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 양심적 지식인의 본격적인 역사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옌자치와 가오가오의 투쟁은 마오쩌둥 사후 정확히 10년 되던 해 열매를 맺었다. 이후 이 책은 영어와 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문혁의 참상을 알리는 교과서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은 문혁 시기 주요 사건을 나열하는 연대기에 그치지 않고, 문혁이라는 “중국 역사에 전례 없는 10년 대동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심리학적 원인을 심층적으로 추적했다는 점에 있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문혁 10년의 대동란은 인격 숭배의 풍조를 만연시킨 사회주의 중국의 독특한 정치문화와 정적을 제거하려는 마오쩌둥 개인의 권력 야욕이 만나서 빚어진 결과였다. 인격 숭배에 대한 옌자치의 비판은 그의 실제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문혁 시절 옌자치는 홍위병 집회에 끌려 나가서 얼굴에 검은 먹칠을 당하는 인격 살해의 모욕을 견뎌야만 했다. 그 험한 고난을 겪으면서 그는 홍위병의 집단광기가 맹목적인 인격 숭배의 문화에서 기인함을 증험(證驗)했다.
1959년 중국과학기술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공부한 후 중국철학원에서 철학을 연구한 옌자치는 1970-80년대 왕성한 저술 활동으로 중국 정치체제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근본적 대안을 모색했던 최상급의 정치철학가였다. 1980년대 중국사회과학원 정치학연구소 소장직을 역임했던 옌자치는 1986-1987년 국무원 총리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이 이끄는 “정치개혁 판공실”에서 활약했다. 1989년 6월 중공중앙은 민주화 운동에 지지를 표명했던 옌자치 등에게 전국적인 수배령을 내렸다. 옌자오치와 가오가오는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급히 탈출했고, 1994년부터 미국 뉴욕시에 체류하면서 중국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옌자치, “문혁의 광기는 개인 숭배가 원인...종신제 폐지” 제안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옌자치가 집필한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살펴보면, 그가 문혁의 역사를 쓰면서 인격 숭배에 착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뼈아픈 체험을 통해 문혁의 집단주의적 광기가 인격 숭배의 광열에서 기인함을 깨달았다. 정치이론가로서 그는 중국 역사에 다시는 제2의 마오쩌둥이 나올 수 없도록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이징의 시단의 민주장(民主牆) 운동 절정으로 치닫던 1979년 2월, 후야오방이 주재하는 “이론 무허회(務虛會, 대토론회)”에 참여한 옌자치는 “간부 및 영도자 직무의 종신제의 폐지”라는 파격적인 법안을 제안했다. 문혁의 광기를 직접 경험했던 중공중앙의 영도자들은 옌자치의 취지에 크게 공감했다. 결국 1980년 8월 18일 덩샤오핑은 권력의 과도한 집중과 관료주의를 비판하면서 옌자치가 제안한 종신제 폐지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이후 장쩌민(江澤民, 1926- )를 거쳐 후진타오(胡錦濤, 1942- ) 총서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 중국의 정치체제는 영도자의 임기가 최장 10년으로 제한되는 합리적인 집단지도체제를 지향했다.
종신제 폐지 2018년 헌법서 삭제...시진핑, 마오쩌둥 될 길 열어
적어도 2018년 3월 11일 전국 인민대표대회가 99.8%의 찬성률로 헌법에 규정된 최고지도자의 임기 제한을 삭제할 때까지 옌자치가 1979년 최초로 입안했던 “종신제 폐지”의 규정은 중국 헌법 속에 명문화되어 있었다. 임기 제한을 폐지함으로써 시진핑은 스스로 마오쩌둥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권력자의 의지에 따라 역사의 수레바퀴가 후퇴할 수 있는가? 역사책은 한갓 권력자의 뜻대로 기술되는 정치선전물인가? 비관적 전망이 없지 않지만, 자명한 두 개의 사실 때문에 역사는 승자만의 기록이 되기는 어렵다. 첫째 그 누구도 영원히 권력을 누릴 수 없는 점, 둘째 많은 인간이 강렬한 진실 규명의 열망을 갖는다는 점이다. 권력자가 제아무리 “승자의 기록”을 독점하려 해도 오래잖아 그 역시 언젠가는 역사의 형틀 위에 발가벗고 설 수밖에 없다.
험난한 망명 생활 속에서 그는 마음속 양심의 소리가 곧 신의 음성임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역사의 신을 믿기에 중국의 민주화를 향한 81세 옌자치의 투쟁은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이에 그의 육성에 귀 기울여 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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