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24>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 묘지명

bindol 2022. 6. 1. 05:12

그 헤어짐과 만남을 헤아려 보면 어느 것이 짧고 길까?

 

- 絜厥離合, 孰短孰長?·혈궐이합, 숙단숙장?



형수님은 남편과 태어난 지 열다섯 해 만에 반쪽씩 합해 부부가 되었고, 부부가 된 지 마흔아홉 해 만에 미망인이라 칭하였다. 그로부터 또 세 해 만에 합장하여 다시 합했으니, 그 헤어짐과 만남을 헤아려 보면 어느 것이 짧고 어느 것이 길까? 그 말씀을 실천하고 뜻을 따른 것을 슬퍼하여 명을 써서 드러내노라.

端人之於夫子也, 生十五年而牉合, 合四十九年而稱未亡. 又三年而祔也合之, 絜厥離合, 孰短孰長? 悲其言踐而志愜, 銘庸章之.(단인지어부자야, 생십오년이반합, 합사십구년이칭미망. 우삼년이부야합지, 혈궐이합, 숙단숙장? 비기언천이지협, 명용장지.)

위 글은 ‘임원경제지’의 저자인 서유구가 형수인 빙허각 이씨(1759~1824)가 세상을 뜨자 쓴 산문인 ‘嫂氏端人李氏 墓誌銘’(수씨단인이씨 묘지명)의 끝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서유구의 시문집인 ‘금화지비집(金華知非集)’ 권7에 수록돼 있다. 그는 여성의 경우 묘지명을 쓰지 않으나, 이씨는 문장가인 데다 열녀로서 삶을 살았기에 지었다고 밝혔다. 이씨는 ‘빙허각시집’ 한 권, ‘규합총서’ 여덟 권, ‘청규박물지’ 다섯 권의 저서를 남겨, 조선 시대 여성 실학자로 평가받는다. 이씨는 1809년 ‘규합총서’를 저술하였는데, 이 저서는 20세기 초까지도 여성들에게 널리 읽히고 인용됐다고 한다.

묘지명의 앞부분 ‘端人(단인)’은 정8품 문무관의 아내의 품계를 뜻한다. 그녀의 남편 서유본(1762~1822)은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대과에는 낙방하고, 1805년 동몽교관이 되었다. 이듬해 중부인 서영수가 해도로 귀양 갈 때에 관직을 빼앗겼다. 서영수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지만, 1806년 안동 김씨의 사화에 연루됐다고 하여 흥양(전남 고흥)을 거쳐 임피(전북 군산)로 유배돼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서유본은 관직을 빼앗긴 이후 학문에 전념하여 ‘좌소산인문집’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씨는 남편이 세상을 버리자 ‘절명사(絶命詞)’라는 글을 지었고, 19개월 후 사망했다.

며칠 전 필자는 작고한 어느 유명 인사의 묘지명 원고를 읽을 기회가 있어,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빙허각 이씨의 묘지명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