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달의 골수로도 옥 같은 볼을 고칠 수 없으니(獺髓未能醫玉顂·달수미능의옥뢰)
온갖 꽃떨기 속에 어여쁜 모양 산뜻한데(百花叢裏淡丰客·백화총리담봉객)/ 홀연히 광풍을 만나 붉은빛을 덜었구나.(忽被狂風減却紅·홀피광풍감각홍)/ 수달의 골수로도 옥 같은 볼을 고칠 수 없으니(獺髓未能醫玉顂·달수미능의옥뢰)/ 오릉의 공자를 끝없이 한스럽게 하는구나. (五陵公子恨無窮·오릉공자한무궁)
위 시는 고려 시대 시인이자 문신인 정습명(鄭襲明·?~1151)의 시 ‘贈妓(증기·기생에게 줌)’로 ‘동문선’에 있다. 이인로의 ‘파한집’에 위 시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남쪽 고을에 재색이 뛰어난 기생이 있었는데 한 군수가 그녀를 총애했다. 군수는 임기를 마쳐 그 고을을 떠나게 되자 “다른 남자가 그녀를 차지하겠지”라는 생각에 기생 얼굴을 촛불로 지져 성한 살이 없을 정도였다. 그 후 정습명이 안찰사로 지나다가 그 기생을 보곤 가련히 여겨 위 시를 써 주고 ‘만약 관리들이 지나가거든 위 시를 보여주라”고 했다. 그 말대로 했더니 보는 사람마다 도와주어 그녀가 잘살게 됐다. 셋째 구의 ‘獺髓’는 수달의 뼛속에 있는 기름이다.
중국 전설을 모은 ‘습유기’에 삼국시대 때 오나라 왕 손화가 수정여의라는 춤을 추다가 잘못하여 등부인의 볼에 상처를 냈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백달수를 옥과 호박설(琥珀屑)에 섞어 바르면 흉터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청구풍아’ 주(註)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등부인을 총애한 손화가 술이 취해 여의무를 추다가 그녀의 뺨을 다치게 하자 흰 수달의 골수를 구해 옥과 호박가루를 섞어 백금으로 이긴 다음 발랐다. 호박이 너무 많아 왼뺨에 사마귀처럼 붉은 점이 생겼는데, 더욱 예뻐졌다.
정습명 시의 마지막 구에 ‘오릉공자’는 중국 한(漢)나라 때 오릉 부근 번화한 지방에 살던 공자로, 부호가의 자제를 일컫는다. 위 시의 기생을 정습명 자신의 모습에 비유한 것이라는 평도 있다. 고려 인종이 세상을 버리면서 정습명에게 의종을 부탁했다. 하지만 의종이 싫어하자 괴로워하던 정습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의종은 이의민에게 비참하게 살해됐다.
어제 저녁 목압서사에서 ‘팔만대장경과 하동’ 주제 초청특강을 가졌다. 고려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나와 위 시가 떠올랐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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