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30> 할아버지와 손자의 따스한 대구(對句) 대화

bindol 2022. 6. 1. 05:23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약주를 되게 잡수신다”(“祖父朝朝藥酒猛”·조부조조약주맹)

 

채수에게 ‘무일’이라 부르는 손자가 있었다. (무일의) 나이가 겨우 대여섯 살 때였다. 채수가 밤에 무일을 안고 누웠다가 먼저 한 구절의 시를 지었다. “손자는 밤마다 독서를 하지 않는구나.” 무일에게 대구를 짓게 했다.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약주를 되게 잡수신다”고 대구를 지었다. 채수가 또 눈 속에 무일을 업고 가다가 한 구절을 지어, “개가 달려가니 매화꽃이 뚝뚝 떨어진다”며, 말을 끝내자 무일이 대구를 맞추었다. “닭이 지나가니 댓잎이 그려지네.”

蔡壽有孫曰無逸. 年纔五六歲. 壽夜抱無逸而臥, 先作一句詩曰: “孫子夜夜讀書不.” 使無逸對之, 對曰: “祖父朝朝藥酒猛.” 壽又於雪中, 負無逸而行. 作一句詩曰: “犬走梅花落.” 語卒, 無逸對曰: “鷄行竹葉成.”(채수유손왈무일. 연재오륙세. 수야포무일이와, 선작일구시왈: “손자야야독서부.” 사무일대지, 대왈: “조부조조약주맹.” 수우어설중, 부무일이행. 작일구시왈: “견주매화락.” 어졸, 무일대왈: “계행죽엽성.”)

조선 선조 때 문신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 실려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주고받는 대구(對句)의 묘미와 함께 조손(祖孫) 간 따뜻한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채수(1449~1515)는 본격적인 국문소설을 등장하게 한 ‘설공찬전(薛公璨傳)’을 쓴 조선 성종 때 문인이자 학자였다. 그의 손자 무일은 과거에 급제해 중종 초상화를 그렸고, 한성부 서윤과 헌납 등을 지냈다. “개가 달려가니 매화꽃이 뚝뚝 떨어진다”는 말은 ‘개의 발자국이 매화 꽃잎 모양이 된다’는 뜻, “닭이 지나가니 댓잎이 그려지네” 는 ‘닭 발자국이 대나무 잎 모양이다’는 뜻이다.

대구는 쉽게 말해 한시 작법에서 글자 수가 같고 의미가 대조되는 두 글귀를 일컫는다. 실제로는 복잡하고 쉽지 않지만, 한시 작법 특징 중 하나이다.

예전에는 대여섯 살이면 ‘천자문’을 배웠다. 천자문의 네 자, 네 자가 대구로 돼 있다. 천자문을 읽으며 대구와 평측을 함께 배운다. 따라서 위 글 내용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다만 글에 뛰어난 할아버지 채수와 영리한 손자 무일의 경우가 흔치 않다. 한문에는 삶의 지혜와 옛사람의 따스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