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들불 난 것 같네(遠見如野火·원견여야화)
바닷가에 신선의 산이 있으니(海上有神山·해상유신산)/ 그 가운데 백련사가 있다네.(中有白蓮社·중유백련사)/ 단청은 아침 해에 어른거리니(金碧映朝日·금벽영조일)/ 봉래산도 그 아래라 하겠네.(蓬壺此其亞·봉호차기아)/ 온 산에 잡목이 없고(漫山無雜樹·만산무잡수)/ 동백만 눈 속에 비치네.(冬柏照雪下·동백조설하)/ 늙은 가지는 돌난간에 누워있어(老柯橫石欄·노가횡석란)/ 나와 암자의 승려가 함께 앉았네.(吾與野僧坐·오여야승좌)/ 비췻빛이 가지를 둘렀는데(翡翠繞枝間·비취요지간)/ 향긋한 꽃술이 어지러이 떨어지네.(香蕊紛紛墮·향예분분타)/ 개울 따라 산속에 수북이 쌓여(隨流積山間·수류적산간)/ 멀리서 보면 들불 난 것 같네.(遠見如野火·원견여야화)
전라도 담양부사를 지낸 임억령(1496~1568)의 ‘백련사동백가(白蓮社冬柏歌)’로, 그의 문집인 ‘석천집(石川集)’ 권2에 있다. 백련사는 강진 만덕산에 있는 절이다. 백련사 동백은 아름다울 뿐더러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임억령은 백련사에서 붉게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멀리서 보면 산불이 난 것 같다고 하였다. 어지러이 떨어져 지천으로 널린 동백꽃을 이렇게 묘사했다. 다산 정약용이 백련사 인근인 다산초당에서 유배를 살며 이 절에서 수행하던 혜장선사와 교유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면서도, 못내 아쉬워 시를 자주 주고받았다.
다산도 시 ‘다산화사(茶山花史)’에서 “동백나무 밀집하여 푸른 숲을 이뤘는데(油茶接葉翠成林·유다접엽취성림)/ 잎은 굵고 각이 지며 꽃은 붉게 피었네(犀甲稜中鶴頂深·서갑릉중학정심)/ …”라며 동백꽃을 자랑한다. ‘유다(油茶)’는 동백꽃 별칭이다. 차나무 잎과 비슷하지만 기름기가 많아 그렇게도 부른다. 잎은 물소 껍질(犀甲)처럼 단단하면서 각이 졌고 꽃은 학 머리에 있는 붉은 점(鶴頂)처럼 생겼다.
필자도 백련사 동백꽃을 좋아한다. 빨갛게 떨어져 쌓인 꽃들은 마치 불이 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도 아주 붉디붉은 불이다. 필자는 일 년에 서너 번 백련사에 들렀다가 오솔길로 다산초당으로 간다. 동백꽃이 제대로 피려면 아직 더 있어야 하는데, 성급한 놈들이 하나 둘 꽃망울을 터뜨린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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