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162> 봄꽃이 피었다 질 무렵 읊은 이행의 시
혹 한가한 이 있어 술을 싣고 올 것이네
- 조해훈 시인·고전인문학자
- 倘有閑人載酒來·당유한인재주래
그윽한 꽃이 수도 없이 분수에 따라 피어나(無數幽花隨分開·무수유화수분개)/ 산 올라가는 오솔길을 일부러 에돌아가네.(登山小逕故盤廻·등산소경고반회)/ 남은 향기 봄바람에 쓸려가지 말기를(殘香莫向東風掃·잔향막향동풍소)/ 혹 한가한 이 있어 술을 싣고 올 것이네.(倘有閑人載酒來·당유한인재주래)
조선 전기 문신인 용재(容齋) 이행(李荇·1478~1534)의 시 ‘花徑’(화경·꽃길)으로, 그의 문집인 ‘용재집’에 수록돼 있다.
때는 지금쯤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주변에 꽃이 무진장으로 피어난 모양이다. 꽃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자꾸만 눈이 팔린다. 질러가는 길이 있는 데도 일부러 돌아서 간다. 봄바람이 한 번 일렁이면 숲은 꽃향기로 가득 찬다. 꽃향기가 봄바람에 다 쓸려갈까 걱정이다. 그런데 봄 숲 꽃은 이미 바람에 날리고 꽃이 진다.
시는 빼어나지만 정작 위 시를 지은 이행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유배살이가 끝없이 이어졌다. 연산군 즉위년인 1495년 급제해 벼슬살이하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 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 함안을 거쳐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됐다. 연산군 시대가 끝나고 다시 기용됐으며,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을 겸임했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 책임을 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531년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그 일파의 반격으로 평안도 함종에 유배돼 그곳에서 사망했다.
시에 아픔이 배어있는 걸 보면 어느 유배지에서 쓴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구에서 그의 마음이 극도로 아프다는 걸 알 수 있다. 봄을 소재로 한 시편들에 유난히 아픔이 많이 담겨 있다. 심희수(沈喜壽·1548~1622)는 시 ‘有悼’(유도·죽음을 애도하며)에서 “금강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가니(錦江春雨丹旌濕·금강춘우단정습)/ 아마도 어여쁜 그대 이별 눈물 남은 것이리니(應是佳人別淚餘·응시가인별루여)”라고 읊었다. 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봄비에 명정이 젖는 걸 보는 시인은 그녀가 못 다 흘린 슬픈 눈물인 것 같다며 애달파한다.
그윽한 꽃이 수도 없이 분수에 따라 피어나(無數幽花隨分開·무수유화수분개)/ 산 올라가는 오솔길을 일부러 에돌아가네.(登山小逕故盤廻·등산소경고반회)/ 남은 향기 봄바람에 쓸려가지 말기를(殘香莫向東風掃·잔향막향동풍소)/ 혹 한가한 이 있어 술을 싣고 올 것이네.(倘有閑人載酒來·당유한인재주래)
조선 전기 문신인 용재(容齋) 이행(李荇·1478~1534)의 시 ‘花徑’(화경·꽃길)으로, 그의 문집인 ‘용재집’에 수록돼 있다.
때는 지금쯤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주변에 꽃이 무진장으로 피어난 모양이다. 꽃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자꾸만 눈이 팔린다. 질러가는 길이 있는 데도 일부러 돌아서 간다. 봄바람이 한 번 일렁이면 숲은 꽃향기로 가득 찬다. 꽃향기가 봄바람에 다 쓸려갈까 걱정이다. 그런데 봄 숲 꽃은 이미 바람에 날리고 꽃이 진다.
시는 빼어나지만 정작 위 시를 지은 이행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유배살이가 끝없이 이어졌다. 연산군 즉위년인 1495년 급제해 벼슬살이하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 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 함안을 거쳐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됐다. 연산군 시대가 끝나고 다시 기용됐으며, 1527년 우의정에 올라 홍문관대제학을 겸임했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 책임을 맡아 끝내고 좌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531년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다가 그 일파의 반격으로 평안도 함종에 유배돼 그곳에서 사망했다.
시에 아픔이 배어있는 걸 보면 어느 유배지에서 쓴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구에서 그의 마음이 극도로 아프다는 걸 알 수 있다. 봄을 소재로 한 시편들에 유난히 아픔이 많이 담겨 있다. 심희수(沈喜壽·1548~1622)는 시 ‘有悼’(유도·죽음을 애도하며)에서 “금강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가니(錦江春雨丹旌濕·금강춘우단정습)/ 아마도 어여쁜 그대 이별 눈물 남은 것이리니(應是佳人別淚餘·응시가인별루여)”라고 읊었다. 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봄비에 명정이 젖는 걸 보는 시인은 그녀가 못 다 흘린 슬픈 눈물인 것 같다며 애달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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